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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구정 오르는 계단길에 촌로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 ||
지난 70년대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대화가 시작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1호선 국도를 ‘통일로’라 명명하여 ‘영광된 통일조국’의 환상을 제시했다. 하지만 협소한 2차선 도로만큼이나 ‘통일조국’의 길은 좁기만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서울~임진각 사이에 시원스런 새 길이 뚫렸다. 바로 자유로다. 때마침 변화된 사회는 봇물터진 자기 주장들로 넘쳐나고 신속하게도 변모했다. 그 못지 않은 속도로 사람들은 자유로를 질주하면서 무한자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길은 분단 현장 임진각에서 멈춘다. 이 길을 넘어 대륙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하는 걸까. 임진각 바로 못미친 곳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 황희 정승의 숨결이 담긴 반구정(伴鷗亭)을 만나게 된다. 새겨보면 이 또한 그럴 듯한 상징이 아닌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의 치세에 조정을 이끈 재상은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와 맹사성 김종서 등이다. 이 중에서도 황희 정승은 나이 87세로 은퇴하기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으로서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에 서있는 ‘반구정’은 방촌이 재상직에서 물러난 뒤 90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머물던 사가 앞 정자다. 자유로가 끝나는 임진각을 5㎞쯤 앞두고 나오는 문산나들목을 이용하면 당동리-사목리를 거치는 짧은 걸음으로 반구정에 도달할 수 있다.
반구정은 강변에 솟은 작은 봉우리 위에서 너른 강변을 굽어보는데, 본래 사람들은 이 정자를 낙하정(洛河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근에 낙하리가 큰마을이었기 때문일 듯도 하지만 봉우리의 강변쪽 사면은 가히 ‘낙하(落下)’라는 말을 떠올릴만큼 제법 아찔하다.
강 뒷편, 방촌 영당지쪽에서 정자에 오를 때는 그저 나직한 평지 끝에 불쑥한 산언덕 하나에 불과하건만, 앞쪽으로 강변을 향하여 내리박힌 형세는 영락없는 절벽이다. 이 절벽은 임진각 방향서 흘러들어오는 강줄기를 되받아 머언 서해쪽으로 돌려놓는 물굽이를 이룬다.
조선 중기 대쪽같은 선비의 전형으로 꼽히는 미수 허목(許穆)이 반구정의 풍광에 감탄하여 <반구정기>란 글을 남겼다.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변에 있고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밭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다.”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평지는 기름진 장단면의 들판으로 퍼져나가다 멀리 개성쯤 가서야 비로소 구릉과 높은 산들에 가로막힌다. 그렇게 바라다보이는 산이 바로 송악산이다.
방촌은 본래 개성 출생. 조정에 매인 몸으로 임진강을 매번 건너기가 어려울 적에 이곳 사목리 천혜의 지형을 찾아내 반구정이란 고향 전망대를 세웠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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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구정 옆에 후학들이 지은 또 하나의 정자인 앙지대(정면 에 보이는 정자). | ||
시원스레 달려오던 자유로가, 좀체로 열리지 않는 분단의 장벽 앞에 숨을 멈춘 즈음 불현듯 나타나는 선현의 자취로부터 한가닥 귀띔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방촌은 청사에 빛나는 청백리지만 그의 귀감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는 너그럽고 중대한 일에는 원칙을 내세움이 추상같아 공사가 엄격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말에 태어나 20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관으로 재직하던 방촌은 이성계가 난을 일으켜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세우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간다.
그의 시대는 오늘에 못지 않게 혼란하였고 또 격동하였다. 젊은 학사 방촌 또한 참된 의(義)와 충(忠)의 길을 두고 인간적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결국 방촌은 그를 아깝게 여긴 이성계의 각별한 간청으로 다시 출사하여 성균관으로 돌아온다.
작게 보면 끝내 두문동에서 몰살당한 72현의 충절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후 60여년에 걸친 엄격하고도 사심없는 자기 헌신의 자세는 그의 ‘변절’을 충분히 변명하고도 남음직하다. 그가 돌아간 뒤에도 그의 청빈과 청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이 나고 있다.
방촌은 공사를 가리고 원칙을 지키는 자세가 단순명료하고도 추상같았다. 젊은 나이에 태조 이성계의 간청으로 현실 정치로 되돌아왔지만 격동기 여느 신진 사대부들처럼 나약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춘추관 사헌부를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태종은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후에 세종)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방촌은 원칙을 내세워 이를 극구 반대하였고, 호랑이 같은 태종의 진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간언을 계속하다 급기야 삭탈관직되어 첫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세종 4년 그는 다시 기용되어 좌참찬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그것도 자신을 쫓아낸 상왕 태종의 간청에 의한 것이었으니 태종 또한 그의 강직하고 슬기로움을 깊이 사랑한 때문이다. 세종 치하의 빛나는 문화발전에는 필경 황희라는 명재상의 소리없는 내조가 큰 기여가 됐을 것이다.
그는 30세 가까이 어린 절재 김종서를 엄격한 채찍질로 다듬었다. 영의정인 방촌이 밤 늦도록 회의를 계속하고 있을 때 호조판서이던 절재가 이를 알고 호조의 관원들에게 음식을 갖추어 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방촌은 김종서를 뜨락에 불러세우고 “나라의 물건을 어찌 사사로이 사용한단 말인가”라며 꾸짖으니 김종서는 땀을 줄줄 흘리며 숨도 제대로 못쉬었다고 한다.
김종서는 호랑이라고 불리는 대장수였다.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 북방을 평정하고 병조판서가 되어 돌아온 뒤에는 조정에서도 두려울 게 없는 실세가 되어 다소 오만해졌다.
어느날 공회에서 방촌은 병조판서가 술에 취해 비스듬히 앉은 것을 보았다. 방촌은 이내 담당 관원을 큰소리로 부르면서 “지금 병판의 자세가 기울어졌으니 의자가 잘못된게다. 얼른 가서 고치도록 하라”고 외쳤다.
김종서는 술이 확깨어 자세를 바로잡으며 옆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육진에서 한밤중 적의 화살이 날아들 때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 땀이 흐르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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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구정에 들른 김에 임진각 통일공원(위사진)을 찾아 오늘을 되새 겨 보자. 아래는 자동차들이 시원스레 내달리는 자유로의 저녁 풍 경. 우태윤 기자 | ||
정승의 유연성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하루는 대감이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하녀들이 저희들끼리 다투고 있다가 쪼르르 달려들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러저러하여 다투게 되었으니 저쪽이 잘못한 것입니다’하였다.
대감은 “그래 네 말이 옳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쪽 하녀가 ‘사연은 이러저러하니 분통한 것은 이쪽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대감은 “그래. 네 말도 옳구나”하였다. 옆에서 듣던 부인(혹은 조카라고도 함)이 놀라면서 ‘모든 다툼에는 필시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기 마련인데, 현명하신 대감께서 어찌 그리 대답하십니까’라고 따지자 대감은 또 “자네 말이 옳네”하였다.
권력자가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무자비한 살육과 보복이 밥먹듯 이뤄지는 게 격동기의 특징이다. 방촌의 이 두루뭉술한 대응법은 이런 시기 결정권자에게 필요한 참다운 지혜로움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면서도 그 흔한 호화주택 하나 마련한 적이 없는 방촌 황희. 늙어 사가로 돌아갔을 때는 방바닥에 멍석 하나를 깔고 살았다.
왕이 듣고 염려하자 “자리가 까실까실하니 늙은이가 가려운 데를 저절로 긁을 수 있어 좋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청빈은 청사에 빛나고 있다.
반구정은 몇번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는데, 지금 것도 소박하긴 하지만 방촌 당대의 것은 더욱 조촐했을 것만 같다. 후대에 고택을 복원하고 영모정을 지었는데, 청빈했던 그의 삶을 욕보일 수 없다하여 단촐한 일자형 민가로 지어졌다.
반드시 먼 길을 가야 여행이거나, 화려한 곳이라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가까이에서 만나는 선인의 품을 헤아리자니 무한한 시간여행의 즐거움이 가슴을 채운다.
선인이 남긴 가르침 또한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그의 깨우침을 이해할 때쯤이면, 자유로의 끝 임진각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여행메모]
자유로를 타고 오두산랜드-낙하 등을 지나쳐 임진각 5km 전방까지 달려간다. ‘문산’ 팻말이 있는 나들목(당동IC)으로 내려가 사목삼거리에서 좌회전. 팻말따라 3분 정도 진행한다. 자유로를 이용하는 편도 거리는 약 70km나 된다.
반구정 인근에는 임진각 통일공원이 있고 자유로 중간에 나오는 오두산랜드의 인삼사우나 아쿠아랜드 금강산랜드 등은 손꼽히는 시설과 수질의 건강 목욕시설들이다. 반구정 바로 옆 강변에 장어구이(2인분 3만4천원부터) 메기매운탕(3만~4만원)을 전문으로 하는 큰 음식점 나루터집(031-952-3472)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