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뉴스] 문익환 목사가 1987년 그토록 김상진 열사를 외쳤던 까닭은?
당신은 김상진 열사를 아는가.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그는 조사 대신 26명의 이름을 불렀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도저히 애도할 수 없는 슬픈 죽음들, 문 목사의 외침은 처절했고 비통했다.
현실은 영화의 거울이다. 문 목사는 조사에서 분명 ‘김상진’이란 이름을 외쳤다. 영화 ‘1987’은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김상진 열사를 잊지 않았다. 아니, 김상진 열사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에 바로 ‘그’가 있었다.
민주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 ‘1987’에만 머물 수 없다. ‘1987년도’에 멈춰서도 안 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김상진 열사.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권력에 맞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할복자살한 서울대 농대생, ‘일요신문i’가 목격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김상진 열사를 소환해 조명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청춘의 절정을 상징하는 꽃피는 봄. 하지만 1975년 봄의 대학가는 그야말로 스산함 자체였다. 그해 겨울, 박정희 정권이 석방된 민청학련 사건의 학생과 교수에 대해 복교와 복직을 거부하면서 대학가는 시위로 봄을 맞았다. 연세대를 중심으로 서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대학생 수천 명이 석방 학생을 위해 복교 시위를 벌였다.
민청학련 사건을 향한 외침은 점차 독재 타도 구호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대학 교정에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유신철폐 구호가 적힌 깃발이 나부꼈다. 3월 31일 권순성·박구진·설훈 등 고려대생 1500여 명이 반독재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 4월 3일 연세대와 서울대, 서강대, 한신대도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봄날을 향해 학생들은 울부짖었다.
김상진 열사. 김상진기념사업회 제공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포정치로 화답했다. 4월 8일 그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고려대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군화발에 교정은 짓밟혔다. 이튿날 ‘인혁당 재건 사건’ 7명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여정남이 대법원 선고 하루 만에 전격 처형당했다. 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으로 대학가의 데모는 더욱 격렬해졌다.
서울대생들도 나섰다. 이들은 4월 6일 수원의 농대, 7일 관악, 8일 동숭동의 치대와 약대에서 잇따라 시위를 벌였다. 군에서 제대해 74년 2학기에 복학한 서울대 농대 축산과 4학년생(68학번, 당시 26세) 김상진은 고뇌하고 또 분노했다. 68년 서울대 농대 축산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이념서클로 불리던 한얼회에서 활동했다.
김상진 열사 생전 사진. 김상진 기념사업회 제공
사법살인이 일어난 8일 오후, 김상진은 비장했다. 한얼회의 비상총회에서, 누군가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김상진은 “내가 하겠다. 내가 정면도전을 하겠다. 이제 더 이상 희생은 안 돼.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도 내가 현 정권에 정면도전을 하겠다”고 말했다. 김상진을 포함해 서울대 농대생들은 4월 11일 대규모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했다.
4월 11일 오전 11시경, 수원 서울대농대 잔디밭에서 300여 명이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광호 씨(75학번)의 기억은 또렷했다.
“유신 이후 긴급조치가 발동됐다. 학생들 간에 시국 토론이나 사회과학 공부가 감시됐다. 참 답답했었다. 박 전 대통령이 71년도에 유신을 하고 반대세력을 엄청나게 탄압했다. 그날 아침, 수원농대 본관 가장 가운데서 학생들이 많이 오고가는 잔디밭에 모였다. 시국토론을 하는 도중에 상진이형이 나왔다.”
수원 서울대 농대 터. 1974년 4월 11일 시국 성토대회가 열린 현장. 이원욱 민주당 의원 블로그 캡처
11시 20분, 김상진은 세 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신사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던 그는 침착하면서도 정열적으로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갔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김상진은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대목을 읽는 도중, 20㎝ 길이의 과도를 품 안에서 꺼냈다. 그는 노트에서 눈을 떼고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라면서 칼날을 하늘로 향했다.
당시 서울대 농대 건물 사진. 강당 맞은 편에 시국집회 장소가 있었다. 이원욱 의원 블로그 캡처
가장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몸을 날려 김상진을 덮쳤다. 하지만 김상진은 오른손에 쥔 칼을 왼쪽 하복부에 내리꽂은 채 위로 그어 올렸다. 집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는 부축하는 동료들을 향해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뒤 의식을 잃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광호 씨(75학번)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서관 옆 느티나무에서, 상진이형이 시국대회 도중 ‘내가 하는 행동에 동요하지 말라’며 배에 칼을 대시고 갑자기 쓰러지셨다. 몇몇 학생이 상진이형을 들고 교문 쪽으로 들고 나갔다. 다들 상진이형 상태를 걱정하며, 대형 강의실에 모여 농성을 했다. 학교와 경찰이 휴교령을 내렸고 교수들이 문을 톱으로 부셨다. 학생들을 전부 끌어냈다.”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는 절규에 가까웠다. 애국가를 들으면서 의식을 잃어가던 그는 수원도립병원으로 실려갔다. 12일 아침 8시 55분경 김상진은 서울대 의대 병원으로 향하는 앰뷸런스에서 26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상진 열사 추모비. 이원욱 민주당 의원 블로그 캡처
김상진은 거사를 앞두고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도 준비했다. 그는 “각하의 숭고한 결단 하나로 사회의 안녕을 가져오고 학원의 평화가 유지되며, 진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민족에게 국민총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며, 단결된 힘으로 뭉친 안보태세의 만전이 기해지리라 믿는 바입니다”라고 썼다.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을 바라는 내용의 ‘유서’였다.
이광호 씨는 “상진이형의 계획을 후배들은 전혀 몰랐다. 후배들 중에서도 가까운 몇 사람에게 별도로 현장에 나오지 않고 양심선언문을 기독교방송과 명동성당에 가져다 주라고 했다”며 “우리가 농성장 안에 있었을 때는 상진이형이 목숨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지만 3일 후에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1988년 김상진 열사 기념사업회 정기총회. 기념사업회 제공
김상진의 시신은 12일 밤 10시경 사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반강제적으로 화장됐다. 화장터에는 사복경찰들이 진을 쳤고, 장례식도 없었다. 유족들이 유골을 몰래 항아리에 담아 중앙청 옆 법륜사에 보관했다가, 1년 뒤 벽제 국제묘지에 안장했다.
이광호 씨도 장례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증언했다. “정보부 요원들과 경찰은 상진이형의 가족들이 시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했다. 화장한 유골도 어렵사리 어머니가 유골 일부를 빼내서 절에 모셨다가 매장을 했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박원순, 고 김근태, 원혜영 등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 죽은 김상진을 위해 장례라도 치러주자는 의견이 오갔다.”
‘김상진 열사 할복자살 사건’은 민주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4월 18일 가톨릭학생지도신부단 주관으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도미사에서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학생들’ 이름으로 ‘조국의 앞날을 위한 제1시국선언’이 발표됐다. 이튿날 윤보선 전 대통령은 4·19혁명 15돌 기념사에서 김상진 기념동상 건립을 제안했다. 신민당은 4·19민주국민상을 김상진 열사 영전에 올렸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김상진 열사 묘소. 김상진기념사업회 제공
서울대 학생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5월 22일 오후 1시,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선 강의가 끝날 무렵 난데없이 경보음이 울렸다. 복학생들이 화재 비상벨을 누른 것이다. 학생들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고, 김도연과 박연호를 포함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말이냐”라는 펼침막을 펴들고 뛰쳐 나섰다. 김상진의 피울음이 들리는 듯 꽹과리 소리가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이것이 바로 ‘오둘둘 사건’이었다. 이 시위 때문에 한심석 서울대학교 총장이 사임했고 박현식 치안본부장, 서울남부경찰서장은 경질됐다. 29명의 학생이 구속됐다. ‘오둘둘 사건’은 70년대 민주화 투쟁의 꽃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피를 부른 18년 독재를 끝장낸 대학생들의 가슴 속에는 김상진 열사의 뜨거운 피가 여전히 살아 숨 쉬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