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제로’ 마무리 다카쓰, 죽 쑤던 넥센 들어가 18경기밖에 출전 못해
왕웨이중은 키 185㎝에 최고 시속 155㎞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 투수다. 2013년 피츠버그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다 그해 룰5 드래프트를 통해 밀워키로 이적했다. 201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14경기에서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0.90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메이저리그 8경기에 불펜으로만 등판해 역시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3.50로 부진했지만, 트리플 A에서 6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05로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지난해 3월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대만 대표로 출전도 했다.
그동안 KBO 리그 외국인 선수는 미국과 남미에서 온 백인이나 흑인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대만 국적으로 KBO 리그에서 뛴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뛴 대만 출신 야구선수는 1980년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활약한 쉬성밍(한국 이름 서생명)이 유일하다. 왕웨이중이 NC와 계약한다면, KBO 리그가 역대 최초로 대만 국적 선수에게 문호를 여는 것이다.
아시아계 선수로 범위를 넓혀도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본인 선수도 이리키 사토시(두산) 모리 가즈마(롯데) 다카쓰 신고(넥센) 오카모토 신야(LG) 시오타니 가즈히코, 가도쿠라 겐(이상 SK)까지 총 여섯 명에 불과했다. 처음 일본인 선수가 KBO 리그에서 뛴 시기는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난 뒤였다.
왕웨이중. 연합뉴스
#최초 일본인 선수 이리키, 한 경기도 못 뛴 모리
KBO 리그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는 이리키 사토시다. 2003시즌을 앞두고 두산과 계약하면서 재일교포를 제외한 순수 외국인 선수 가운데 첫 일본인으로 등록됐다. 오른손 투수였던 이리키는 일본과 한국, 대만 프로 리그에서 모두 뛰었다.
출발은 일본 리그. 1989년부터 긴테쓰에서 5년간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1996년 포수 요시모토 료와 맞트레이드돼 히로시마로 이적했지만 단 6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양 구단이 시즌 종료 후 두 선수를 다시 맞바꾸면서 이리키는 긴테쓰로 돌아갔다. 1999년엔 다시 요미우리로 이적해 동생인 이리키 유사쿠와 한솥밥을 먹었다. 요미우리 팀 역사상 최초의 형제 선수였다. 하지만 2년간 요미우리에서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하고 2000년 말 방출됐다. 다시 야쿠르트로 팀을 옮겼지만 2001년 10승을 끝으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2002시즌 후 방출된 이리키에게 한국행을 권유한 것은 동생 유사쿠였다. 때마침 두산은 최고 외국인 선수였던 타이론 우즈와 개리 레스를 모두 일본에 빼앗겨 발을 동동 구르던 차였다. 김인식 당시 두산 감독은 마무리 투수 진필중이 KIA로 이적하면서 공석이 된 소방수 자리를 이리키에게 맡겼다. 정작 이리키는 마무리 적응에 실패해 고전하다 6월부터 선발 투수로 전환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리그에서 가장 많은 다섯 번의 완투를 했다. 그 가운데는 완봉승 1회도 포함됐다. 39경기에서 7승 11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74를 기록했다. 하지만 결국 임팩트가 부족해 재계약은 하지 못했다.
한국을 떠난 이리키는 2004년 대만 최강팀인 라뉴와 계약해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4승만 남기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에는 처남이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에서 근무하다 인형 제작 회사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 가즈마는 이리키처럼 2003시즌을 앞두고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이리키가 2002년 12월, 모리가 2003년 1월 계약해 단 한 달 차이로 ‘최초의 일본인 선수’ 타이틀을 놓쳤다. 당시 2년 연속 최하위 굴욕을 당한 롯데는 메이저리그 몬트리올 산하 트리플 A를 경험한 모리를 영입해 마운드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지금 모리를 기억하는 롯데 팬은 거의 없다. 1군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해서다. 모리는 선발 한 자리를 꿰찰 것으로 예상됐지만, 시범경기에 네 차례 등판해 평균자책점 9.64로 부진했다. 기대를 모았던 제구력도 형편없었다. 결국 모리는 계약 후 3개월 만인 4월 1일, 개막도 하기 전에 퇴출당하는 비운을 맛봤다.
시오타니 가즈히코. 연합뉴스
역대 세 번째 일본인 선수이자 최초의 일본인 야수는 2006년 SK에서 뛴 시오타니 가즈히코다. 1993년 한신에 포수로 입단한 그는 팀에 쟁쟁한 포수가 즐비했던 탓에 줄곧 2군에만 머물렀다. 1996년 시즌 마지막 경기인 주니치전에 대타로 나서 프로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장식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포수들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결국 2001시즌이 끝난 뒤 트레이드로 오릭스 유니폼을 입었다.
2003년은 시오타니에게 하이라이트였다.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우고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그러나 2004년과 2005년 계속 하락세를 타면서 끝내 방출됐다. 새 팀을 찾던 그는 SK행을 결심하고 한국으로 왔다.
초반엔 성공적이었다. 개막 후 23경기에서 19타점을 올리며 중심 타자로 자리를 잡아갔다. “진루타를 쳐야 한국 야구가 발전한다”는 과감한 발언을 서슴지 않아 ‘괴짜’로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5월 9일 KIA전에서 상대 투수 장문석의 공에 손가락을 맞고 뼈가 골절됐다. 전치 8주 진단이 나오자 SK는 결국 시오타니를 방출했다. 그는 그렇게 은퇴해야 했다.
이후의 인생도 순탄하지는 못했다. 2007년 입식 타격기 ‘K-1 재팬’에 도전하기도 했고, 사회인야구 리그 지도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2년 갑작스럽게 사기 혐의로 체포돼 충격을 안겼다. “음식점 매출을 받을 권리를 양도해주겠다”며 지인을 속여 현금 550만 엔을 받아 챙긴 혐의였다. 시오타니는 경찰에 “사업비와 생활비가 필요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해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 역대 최고 경력자 다카쓰 신고
2008년에는 일본인 선수 가운데 역대 최고 경력을 가진 선수가 한국 땅을 밟았다. 넥센과 계약했던 다카쓰 신고다. 다카쓰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에서 뛴 15년간 네 번이나 세이브왕에 올랐고, 일본시리즈 통산 11경기에서 16⅔이닝을 던지면서 2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해 야쿠르트 팬들에게 ‘미스터 제로’로 불렸다. 야쿠르트가 우승할 때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헹가래 투수’는 늘 다카쓰였다.
입단 당시에는 선발 요원으로 꼽혔지만, 1993년 첫 세이브를 올리면서 마무리로 전향했다. 그해 20세이브로 팀 우승에 힘을 보탰다. 이어 1994년 구원왕에 오르면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갔다. 2003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가 기록한 통산 229세이브를 넘어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을 다시 썼다. 2012년 이와세 히토키가 이 기록을 다시 깨기 전까지 10년간 그 기록을 지켰다.
일본에서 더 이룰 것이 없었던 그는 2004년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그해 6승 4패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31을 기록하면서 35세 나이로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투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급격한 부진에 시달리다 시즌 도중 방출됐고, 뉴욕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한 뒤에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숙소 욕실에서 발가락 골절상을 입어 2군으로 내려갔다.
히어로즈는 2008시즌 도중 새 외국인 선수가 필요해지자 다카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곳 없었던 다카쓰도 흔쾌히 한국으로 왔다. 다만 당시 팀 성적이 좋지 않아 18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일본 NHK가 다카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좀처럼 경기 장면을 찍지 못해 애를 먹었을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베이징올림픽 기간 동안 프로야구가 중단되면서 다카쓰가 세이브를 올리는 장면을 찍기까지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했다는 후문이다.
어쨌든 다카쓰는 1승 무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0.86으로 좋은 활약을 했다. 다만 주자를 종종 내보내 ‘다카쓰 극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 넥센이 외국인 투수 대신 타자를 영입해 공격력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다카쓰도 한국과 짧은 인연을 마치고 작별했다.
다카쓰의 야구 열정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40세 나이에 빅리그에 재도전했다. 결국 성공은 하지 못했다. 2010년에는 대만 프로야구팀 싱농에 입단하면서 최초로 한국, 미국, 일본, 대만 리그를 모두 경험한 일본인 선수가 됐다. 2010년 4월 1일 첫 세이브를 올리면서 4개국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싱농과 재계약하지 못한 뒤에는 일본 독립리그로 옮겨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국 2012년 은퇴했다. 이후 그가 전성기를 보낸 친정팀 야쿠르트에서 투수 코치와 2군 감독으로 일했다.
카도쿠라 겐. 연합뉴스
# 6년 머문 카도쿠라, 1년 만에 돌아간 오카모토
다카쓰가 떠난 2009년에는 SK에 키다리 일본인 투수가 한 명 찾아왔다. 일본인 선수 중 가장 오랜 시간 한국에서 뛴 카도쿠라 겐이다. 1996년 주니치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긴데쓰, 요코하마, 요미우리를 거치면서 일본 프로야구 통산 76승을 쌓아 올린 베테랑 투수였다. 2009년 초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참가했지만, 개막 직전인 4월 2일 방출 통보를 받아 좌절한 상태였다.
때마침 마이크 존슨의 대체 선수를 찾던 SK가 재빨리 카도쿠라를 낚아챘다. 카도쿠라는 그해 시즌 도중 8승을 올리고 평균자책점 5.00을 기록하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호투하면서 ‘빅 게임 피처’의 면모를 보여줬고, ‘가을 남자’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얻으면서 이듬해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0년 14승을 올리면서 SK가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데도 큰 힘을 보탰다. 그러나 11월 대만에서 열린 한국-대만 클럽 챔피언십에 출전했다가 무릎 상태가 악화되면서 SK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팀을 옮겨 삼성과 계약하면서 KBO 리그 생활을 이어갔지만, 7월 무릎 부상이 다시 찾아오면서 끝내 방출됐다. 삼성은 성적과 별개로 카도쿠라의 능력과 성품을 높이 사 2013년부터 인스트럭터 역할을 맡겼다. 2014년에는 2군 투수코치, 2015년에는 1군 불펜 코치로 몸담기도 했다. 선수 시절을 포함해 6년간 한국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러나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현재 일본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카도쿠라가 SK에서 승승장구하던 2010년, LG에서도 일본인 마무리 투수 오카모토 신야가 활약했다. 사회인 야구 출신인 오카모토는 2000년 주니치에 입단한 뒤 일본 프로야구 통산 357경기에 출전한 베테랑 불펜 투수였다. 2008년 FA 보상선수로 세이부로 이적한 뒤 2년 만에 방출돼 2010년 LG의 문을 두드렸다.
시즌 초반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반 이후 급격하게 성적이 떨어졌다. 1년간 46경기에 등판해 5승 3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롯데 경기 때 팬들이 외치는 ‘마!’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해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그는 1년을 뛰고 LG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주니치 시절 은사인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라쿠텐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한 경기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결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은퇴 후 음식점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실업야구 첫 대만인 서생명, ‘불꽃 투구전’서 조계현에 판정승 ‘서생명’. 대만인 쉬성밍이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 직접 만들었던 이름이다. 그는 한국 야구와 가장 인연이 깊은 대만 야구인이다. 오른손 투수였던 쉬성밍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다. 입단 첫해 왼손 투수 양상문(현 LG 단장)과 원투 펀치를 이뤄 한국화장품의 17승 1무 3패 신화를 이끌었다. 특히 1988년 7월 9일 실업야구 하계리그 결승전은 쉬성밍이 남긴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한국화장품 선발 투수로 등판해 농협 선발 투수 조계현(현 KIA 단장)과 연장 11회까지 불꽃 튀는 투수전을 펼쳤다. 10회까지 두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0의 행진’을 이어갔고, 결국 연장 11회 조계현이 홈런을 맞고 3점을 내주면서 2안타 1실점으로 막은 쉬성밍이 판정승을 거뒀다. 동시에 한국화장품은 실업야구 봄철리그, 마산시장기 대회에 이어 3관왕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 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없던 탓에 결국 프로야구 진입 꿈은 이루지 못했다. 쉬성밍은 1988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대만으로 돌아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6개 팀 감독을 거치면서 통산 715승을 올렸다.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대만 최고의 야구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대만 국가대표 감독도 역임했다. 아테네 올림픽 예선으로 치러진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만이 한국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 올림픽 본선 티켓을 앗아갈 때, 대만 지휘봉을 잡고 있던 감독이 바로 쉬성밍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도 많이 겪었다. 웨이취안 감독 시절이던 1999년 조직폭력배의 승부 조작 제안을 거부하다 길거리에서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리는 부상을 당했다. 또 이따 시니우를 이끌던 2013년에는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해 충격을 안겼다. 그해 8월 24일 슝디전을 끝낸 뒤 귀가해 부인과 산책을 하다가 돌연 쓰러졌고, 그대로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만 야구계도 깊이 애도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