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중근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LG 신연봉제’ 본보기로 직격탄 맞아
한화 외야수 이용규는 그런 의미에서 최근 화제가 됐다. 2014년 한화와 4년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그는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 연봉 9억 원을 받았다. 그러나 내년에는 연봉 4억 원만 받고 뛴다. 무려 5억 원이 깎였다. KBO 리그 역대 최고 삭감액이다.
이유가 있다. 이용규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다시 FA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2017년 팔꿈치 통증 탓에 개막 엔트리에서 빠졌다. 복귀 후에도 다시 오른 손목 골절로 재활하느라 1군에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결국 이용규는 FA 신청을 1년 미루고 2018년에 다시 자격을 얻기로 했다. 연봉 협상에서도 2017년 연봉의 절반도 안 되는 4억 원에 사인했다. 1년 연봉을 대폭 줄이는 대신, 향후 FA 시장에 나왔을 때 다른 구단이 느껴야 할 보상금액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
이용규의 연봉 삭감은 어느 정도 구단과 선수의 이해관계와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앞서 다른 베테랑 선수들은 다양한 이유로 연봉이 수억 원씩 깎여 나가는 칼바람을 맞아야 했다. 대부분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이다. 연봉이 수억 원 삭감됐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이상의 돈을 받았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용규. 사진 출처 =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 박명환, 하루아침에 5억에서 5천으로
이용규 이전까지 가장 많은 금액이 삭감됐던 선수는 박명환이다. 이용규는 5억 원이 깎이고도 4억 원을 받지만, 박명환은 다르다. 2011시즌을 앞두고 LG와 종전 5억 원에서 4억 5000만 원 삭감된 5000만 원에 사인했다. ‘억대 연봉’조차 지키지 못했다. 삭감률은 무려 90%에 달한다. 이 수치는 삭감 금액과 별개로 여전히 가장 큰 폭의 추락으로 남아 있다. 이용규와 삭감액은 5000만 원 차이지만, 삭감률(이용규 55.6%)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이유가 있다. 박명환은 2007시즌을 앞두고 LG와 4년 FA 계약을 했다. 몸값 총액은 40억 원. 당시로서는 역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거액의 몸값이었다. 그는 이적 첫해인 2007년 10승 6패 평균자책점 3.19로 활약했지만, 나머지 3년은 부상 탓에 24경기에서 단 4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선수가 4년 뒤 FA 자격을 다시 얻으려면 네 시즌 동안 규정이닝의 ⅔ 이상을 던지거나, 1군 등록일수 145일이 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박명환은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해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LG와 재계약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결국 LG는 3년간 부진했던 박명환의 연봉을 5000만 원으로 낮췄다. 박명환은 그 후에도 더 이상 기회를 잡지 못하고 2012년을 끝으로 방출됐다. NC에서 2년 더 뛰고 은퇴했다.
사실 삭감액과 삭감률 1위는 손민한이다. 그렇지만 1년 동안 선수로 뛰지 못한 뒤 돌아온 상황이라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한다. 롯데 에이스였던 그는 2011년 당시 투수 최고액인 연봉 6억 원을 받고 뛰었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얽혀 롯데에서 방출됐고, 1년간 선수로 뛰지 못했다. 그런 손민한에게 김경문 NC 감독이 다시 기회를 줬다. NC는 2013년 4월 손민한과 연봉 5000만 원에 육성선수로 계약했다. 6억 원에서 91.7% 삭감된 금액이었다. 야구를 계속 하고 싶던 손민한은 이 연봉을 감수했다. NC에서 3년을 더 뛰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은퇴했다. 은퇴 직전까지 포스트시즌에 등판했을 정도로 재기에 성공했다.
박명환
# 김병현, 6억에서 2억으로 삭감
김병현은 한꺼번에 4억 원을 잃었다. 2013년 넥센에서 6억 원을 받았지만, 이듬해 재계약하면서 연봉 2억 원 안을 받아 들여야 했다. 삭감률은 66.7%였다. 당시만 해도 역대 2위 삭감액에 해당하는 금액. 2013년 한 시즌 동안 15경기에서 75⅓이닝을 던지면서 5승4패 평균자책점 5.26에 그친 데 따른 결과다.
이전까지 넥센은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날렸던 김병현의 자존심과 무형적 가치를 최대한 인정하고 대우했다. 김병현은 2012년 국내로 복귀하면서 연봉 5억 원을 받고 넥센에 입단했고, 첫해 3승 8패 평균자책점 5.66을 기록하고도 연봉은 6억 원으로 더 올랐다. 투수 보직 결정 과정에서도 “선발투수로 뛰고 싶다”는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받았다.
그러나 2013년 한 해 동안 넥센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4번 타자 박병호를 비롯한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했고, 젊은 투수들이 꾸준히 성장해 팀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뒷받침했다. 반대로 김병현은 2년째 팀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2년간 34경기에서 8승 12패 3홀드 평균자책점 5.44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넥센은 “뚜렷한 삭감 요인이 많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김병현 대신 한현희 같은 새 주축 투수들의 연봉을 대폭 인상했다. 김병현도 담담하게 구단의 뜻에 동의했다. 그러나 결국 넥센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바로 그해 4월 고향 팀 KIA로 트레이드됐다. 김병현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KIA에서도 방출됐다.
이종범
이종범과 정민태 같은 당대의 레전드 스타들도 기량이 하향 곡선을 그리던 선수 말년에는 연봉 대폭 삭감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다. 이종범은 2007년 5억 원에서 2008년 2억 원으로 연봉이 내려앉는 아쉬움을 감당했다. 38세에 접어든 이종범이 2007년 84경기에서 타율 0.174 1홈런 18타점으로 최악의 시즌을 보낸 뒤였다.
서서히 은퇴 얘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종범은 구단과 선수 생활 연장에 합의한 뒤 “대신 연봉은 구단에 백지 위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는 3억 원 삭감. 당시로서는 역대 최고 삭감액이었다. 이종범은 독기를 품었다. 이듬해 110경기에서 타율 0.284 1홈런 38타점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3할 타율에 복귀하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지만 KIA도 이종범의 선수 생활 연장을 납득했다.
정민태는 2007년 현대에서 3억 1080만 원을 받고 뛰었다. 그러나 2008년 팀이 해체되면서 38세 나이에 새 팀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1999년 20승을 올린 투수지만, 2005년 어깨 수술을 받은 뒤 하락세가 완연했다. 3시즌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이미 2005시즌을 앞두고 한 차례 연봉 대폭 삭감을 당하기도 했다. 2004년 연봉이 7억 4000만 원이었지만 그해 7승 14패에 그친 뒤 이듬해 5억 5500만 원으로 1억 8500만 원이나 깎였다. 당시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삭감 규모였다. 그는 10% 삭감안을 주장하며 구단과 줄다리기 했지만, 현대는 25% 삭감안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미국 스프링캠프 출국 직전에야 계약서에 사인한 뒤 담배까지 끊고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그 후 2년간 연봉은 계속 뭉텅이로 줄어들기만 했다. 2억 4420만 원이 더 사라져 3억 원대까지 내려갔다. 정민태는 2007년에도 7경기에서 승리 없이 6패 평균자책점 12.81을 기록한 뒤 간판을 바꿔 단 히어로즈에 스스로 FA 공시를 요청했다. 이때 정민태에게 손을 내민 팀이 KIA다. 범 현대그룹인 KIA가 현대를 네 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던 왕년의 에이스를 외면하지 않았다. 정민태는 결국 연봉 7000만 원에 KIA 유니폼을 입게 됐다. 전년 대비 삭감률은 77.5%. 하지만 KIA에서도 단 한 경기에만 마운드에 오른 뒤 시즌 도중 은퇴했다.
정민태
골든글러브를 일곱 번이나 수상했던 명포수 김동수도 정민태와 같은 시기에 시련을 겪었다. 모기업 없이 독립적으로 야구단을 운영하는 히어로즈가 현대 선수단을 인수하면서 구단 몸집 줄이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전년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연봉을 제시받았고, 고참 김동수 역시 정민태와 마찬가지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2007년 현대에서 연봉 3억 원을 받았지만, 팀이 바뀌면서 이듬해 무려 2억 2000만 원이 삭감된 8000만 원에 사인했다. 삭감률도 73.3%나 됐다. 통산 2000경기와 200홈런을 채우고 싶다는 열망이 구단과 싸우던 김동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그는 두 기록에 각각 84경기와 홈런 1개만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 같은 팀에서 뛴 외야수 전준호도 그해 2억 5000만 원에서 1억 8000만 원이 깎인 7000만 원(삭감률 72%)에 도장을 찍었다.
2012년 KIA 최희섭(4억 원→1억 7000만 원)과 LG 봉중근(4억 원→1억 7000만 원)은 나란히 같은 해 2억 3000만 원씩 연봉이 깎였다. 최희섭은 부상과 부진으로 2011년 70경기에만 출전하면서 타율 0.281 9홈런 37타점을 올리는 데 그친 탓이다. 또 팀 단체훈련 첫날부터 감기 몸살 등을 이유로 훈련에 불참했고, 이후에도 팀에 합류하지 않은 채 개인행동을 했다. KIA가 수도권 구단과 최희섭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그러나 최희섭이 구단에 사과의 뜻을 전하고 팀 훈련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최희섭은 연봉 대폭 삭감과 함께 팀이 부과한 벌금 2000만 원도 받아들여야 했다. 봉중근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LG의 ‘신연봉제’ 영향을 받았다. 팔꿈치 수술과 수술로 2011년 4경기에 나서는 데 그치면서 고액 연봉자였던 봉중근이 본보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이외에도 SK 박재홍(2011년 4억 원→2012년 2억 원)과 박경완(2012년 5억 원→2013년 3억 원), 롯데 정대현(2016년 3억 2000만 원→2017년 1억 2000만 원) 등 정상급 기량을 뽐낸 선수들도 성적 부진에 따른 연봉 한파를 피하지 못했다. 세월의 무상함과 냉정한 프로의 현실을 실감해야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LG 신연봉제 살펴보니…팀과 개인 모두에게 철저한 성과주의 적용 LG는 2010시즌이 끝난 뒤 “선수들의 연봉 정산에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신 연봉제’다. 생소한 이름에 선수들이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본격적인 연봉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거센 반발과 논란이 이어졌다. 선수들이 혼란에 휩싸이면서 한동안 선수단 분위기가 어수선했을 정도다. 신 연봉제의 원리는 이렇다. LG 구단이 원래 산정하던 내부 연봉 고과 점수에 ‘팀 승리 기여도(Win Share·윈 셰어)’라는 새로운 항목을 포함해 금액을 정산하는 방식이다. 윈 셰어는 특정 선수가 팀 승리 가운데 몇 승 정도에 기여했는지를 수치화한 지표다. 영화 <머니 볼>에 등장하는 세이버 매트릭스 전문가 빌 제임스가 고안했다. 팀 승리 수에 3을 곱한 숫자를 전체 파이로 놓고 선수들끼리 그 안에서 비중을 나누는 톱다운 방식이다. 예를 들어 LG가 한 시즌 70승을 올렸다면 전체 선수단이 210승 가운데 각각 어느 정도 승리에 기여했는지를 나누는 것이다. 오랜 기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LG는 기존 고과 산정 방식과 윈 셰어를 50%씩 적용해 최종 고과를 계산하겠다고 공표했다. LG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분명하다. 절대 평가를 상대 평가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윈 셰어를 사용하면 타 구단들 선수들과도 상대 평가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LG보다 더 많은 승리를 따낸 팀 선수는 LG 소속 A 선수와 비슷한 성적을 냈다 해도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팀이 많이 이겨야 그만큼 선수단 전체 연봉 인상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팀과 개인 모두에게 철저한 성과주의를 적용한 셈이다. LG 구단주인 구본준 부회장의 뜻이 반영된 정책이다. 구 부회장은 도입 당시 “프로 골퍼는 성적이 좋지 않거나 부상을 당하면 그해 돈을 벌 수 없다. 그러나 프로야구에선 3억 원을 받던 선수가 한 해 부상으로 뛰지 못해도 이듬해 2억 원은 받게 되더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대로 3000만 원을 받던 선수가 굉장히 잘했다면 다음 시즌에 1억 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신 연봉제는 파격적인 연봉 인상과 삭감을 불러왔다. 당시 고졸 2년차였던 유격수 오지환은 연봉이 2400만 원에서 단숨에 1억 원으로 올랐다. 2006년 한화에서 정규시즌 MVP와 신인왕을 석권한 류현진과 똑같은 인상폭이다. 외야수 ‘작은’ 이병규 역시 연봉이 28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뛰어 올랐다. 반면 박명환은 5억 원에서 5000만 원으로 깎였고, 심수창은 연봉이 7000만 원에서 3000만 원으로 낮아졌다. 윈 셰어 적용의 형평성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LG는 선수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 뜻을 관철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신 연봉제’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선수단 내부에서 크고 작은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도입 첫해와 같은 시행착오는 서서히 줄여가는 모양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