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길인지 물길인지… 바다와 나도 ‘하나로’
▲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달리는 백수해안도로. 이곳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해안 드라이브길이다. | ||
한 해의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이즈음 서해를 다시 찾은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핑계’로 ‘낙조’와 만나기 위해서. 수많은 서해안 해변 중에서도 남녘 영광의 백수해안 도로를 선택한 것은 아직도 그곳엔 늦가을의 햇살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전남 영광에는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새롭게 조성된 ‘백수 해안드라이브’ 길이 있다. 이 해안길이 생기고 나서는 영광 여행이 한층 즐거워졌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금방이라도 바닷물이 넘실거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구불구불 아름다운 해안길을 만들었다. 때로는 물이 빠져 나가 헐벗은 개펄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때로 맑지 않은 회색물이 출렁거릴 때도 있다. 하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징이니 애써 물때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해안길은 길용리 원불교 성지에서 홍곡거리 해안을 끼고 장장 19km나 이어진다. 홍곡-길용리-법성포를 잇는 반대 순서로 찾아도 상관없다. 백수 해안길은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영화 <마파도>(동백마을) 촬영지로 알려진 이후 발 빠르게 소문이 나서 평일에도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들 정도가 되었다.
백수 해안길은 국내에서 손꼽을 수 있는 아름다운 해안드라이브 길이다. 물 빠진 바다에는 빈 배들만 널브러져 있지만 물이 들어오면 잿빛 바닷가 위로 조업을 하는 배들이 빼곡하게 해안을 메울 것이다. 바다 너머 법성 포구가 차창 밖으로 비껴가고 이내 한창 건립중인 백제 불교 도래지 기념관의 모습도 엿보인다. 수평선과 해안선이 어우러진 풍광을 음미하려면 그저 숨 가쁘지 않게 천천히 차를 움직이면 된다.
해안길 초입에 만나는 모래미 해수욕장. 백수읍 ‘삼두구미’(三頭九尾)의 하나인 구수리 구시미 마을에 위치한 이곳은 모래찜질의 명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모래찜질은 신경통에 크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크지 않은 모래사장이 이어지는 곳에 개인 리조트가 온 터를 다 차지하고 있어 해수욕객들이 없는 이즈음에는 오히려 썰렁하다.
도로변에 10여 분을 서 있어도 차 한 대 지나치지 않은 한적한 해안길이라 어렵사리 마주치는 차들이 반갑다. 운전중에 언덕 위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어촌 마을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바다 속에 들어앉은 낙월도, 안마도, 칠산도 등 섬들과 간간히 눈 맞추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 두번째 사진은 두우리 해변에 물이 빠지면 인근 주민들이 나와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굴을 딴다. | ||
무엇보다 이 계절, 백수 해안길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붉디붉은 열매가 있다. 해안길을 따라 30리 이어지는 해당화 길. 여름철 분홍 꽃을 피워냈다 새색시처럼 수줍게 꽃잎을 떨구던 해당화가 이젠 새 생명을 틔우려 열매를 맺고 있다. 붉은 열매의 상당수는 바짝 다가선 추위에 ‘입술 주름’투성이지만 아직도 성성하게 제 색을 간직한 열매들은 남녘의 바다 햇살을 받으며 해맑게 미소 짓고 있다.
눈길을 돌려보면 억새밭도 눈부시다. 아직 꽃잎이 남아 있는 억새꽃이 휘어진 도로변에서 바람결에 하늘거리며 은빛으로 출렁거릴 때 바다까지도 지는 햇살에 일렁거리는 듯하다. 잠시 몽롱한 현기증이 난다.
해안길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는 서너 곳의 전망대도 있다. 모두들 지는 해를 잘 볼 수 있는 장소에 세워놓은 조형물이다. 더 높게 올라가 보라고 길 건너 산 언덕 위에도 만들어 두었다. 붉은 해당화 열매가 이어진 길을 따라 바다를 온통 진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낙조는 보는 이들의 가슴에도 또 하나의 불을 당긴다.
하지만 늘 볼 수 있는 장관은 아니다. 일부러 해질녘에 시간을 맞추어 사람들이 전망대 주위로 모여들지만 무심한 해는 두터운 구름 뒤로 곧잘 숨어버린다. 좀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얄미운 해다. 백암전망대를 다 지나고서도 해안길은 이어진다. 길을 가다 보면 진주 정씨 가문의 열부들이 왜군의 수모를 피하기 위해 바다에 투신, 정절을 지켜냈다는 ‘정유재란 열부순절지’(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23호)도 만날 수 있다.
해안길 또 다른 길목에서 ‘석구미 전통 해수찜’이라는 팻말을 따라 호기심에 내려가봤다. 좁은 마을길을 지나 바닷가 옆에 자리 잡은 민가 한 채. 집 앞에 있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해변 바위가 바로 ‘전통 해수찜’을 해온 자리다. 봄, 가을철이 아니고서는 이용할 수 없다는데 약 2백 년 전부터 이 천연의 돌탕에서 해수찜을 즐겼다고 한다. 밭에 가야 한다는 아낙을 보내고 무화과 열매를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다시 도로변으로 나와 염산면 소금창고를 찾았다.
염산면은 이름에서도 ‘소금 향내’가 난다. 이곳에는 아직도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미 소금 채취 작업은 끝이 났고 김장철을 맞이해 창고에 쌓아두었던 소금양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 이제는 잊혀져가는 옛 모습의 소금창고는 그들에겐 생업이지만 여행객들에게는 향수를 안겨준다. 너덜너덜 기운 천막 같은 소금창고 벽면마다 ‘소금 판매’라는 글자와 함께 전화번호가 서투른 글자로 새겨져 있다. 주위로는 초록빛이 성성한 파밭이 펼쳐지고 갈대가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다. 그 광경에 취해 잠시 다시 봄을 맞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염산면 두우리 해변의 개펄 | ||
두우리를 비껴 해안길에 들어서면 멀지 않은 곳에서 설도 포구를 만나게 된다. 물때에 맞춰 포구 앞을 찾아드는 머구리배들. 오래전에는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는 일시적으로 파시가 생겼는데 지금은 즉석 회를 파는 포장마차가 즐비하다. 그날그날 잡혀온 물고기들이 큰 그릇에 담겨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이 포구에서는 작은 새우가 많이 잡혀 오래전부터 젓갈을 담았다. 하얀 새우라는 이름이 붙어 ‘백하젓’이라고 한다. 몇 집에 젓갈 매장이 있으며 그 외에 직접 담가 파는 난전도 있다. 영광군에서 국산이 아니면 취급하지 못하게 해 안심하고 국내산 젓갈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청정해역에서 잡은 살찐 새우와 빛깔 고운 천일염인 염산소금이 빚어낸 설도 육젓. 이제는 젓갈축제를 열 정도지만 아직까지는 외지인들의 손길이 많지는 않은 편이다.
포구에서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도로 변 너머에 있는 갈대밭이다. 그다지 소문나지 않아서인지 광활한 갈대밭이 이날 따라 더 커 보인다. 갈대들은 저마다 바람에 흔들거리며 하염없이 고갯짓을 하고 있다. 수많은 갈대들이 한 해가 흘러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도리질 치는 듯 보이는 것은 순전히 객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행안내]
★가는 길·대중교통: 서울 및 광주, 목포, 전주에서 고속버스와 직행버스를 이용해서 영광까지 간다. 영광직행터미널에서 백수 대신리행 이용.
·자가 운전: 서해안고속도로-영광나들목-영광 방향 23번 국도-영광읍-백수 방면 844번 지방도로(3.5km)-만곡에서 우측 군도로 진입-천정저수지-원불교성지-모래미에서 77번 국도 이용-봉남-염산면. 염산면에서 설도 포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별미집: 백수 해안길에는 간간히 횟집이 있다. 그 외에는 법성 포구에서 굴비백반을 맛보는 것이 좋다. 법성 포구에 있는 일번지 식당(061-356-2268)은 소문난 맛집이다. 보통 4인 기준. 반면 읍내 새마을 금고 뒤켠에 자리한 백제식당(061-356-2268)은 1인분의 백반을 내주는 곳이다. 포구의 만나 식당은 배에서 직접 가져온 싱싱한 해물을 넉넉하게 넣은 탕 종류로 유명하다. 설도 포구의 설도횟집(061-352-8696)이나 포장마차에서 즉석 회를 즐겨도 좋다.
★숙박: 백수 고두섬 주변에 몇 곳 있으며 그 외에는 영광읍내나 법성 포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읍내에는 신라호텔(061-353-3333)과 관광호텔 아리아(061-352-7676) 등이 있으나 염산면에는 모텔한 곳뿐임을 참조할 것.
이혜숙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