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훈련 때 최민정 기록 조작” 증언…한체대가 기획하면 빙상연맹은 실행한다
지난해 4월 쇼트 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뒤 열린 빙상연맹 경기력향상위원회의에서는 쇼트 트랙 500m, 1000m, 1500m 개인종목 선발선수를 정할 때 1명을 지도자 추천으로 뽑자는 안건이 올라왔다. 기존 개인종목 선발선수 결정은 성적순이었다. 일부 위원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지만 또 다시 추천제의 암운이 대한민국 빙상계를 뒤덮을 뻔했다. 국가대표 선발에 관여하는 빙상연맹의 경기력향상위원회는 박세우 여자 쇼트 트랙 코치가 위원장을 맡아 김선태 쇼트 트랙 총감독, 송경택, 이호석, 진선유 옛 국가대표, 외부인사 1인 등 총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도자 추천제를 도입하려는 이유로 한체대 소속 선수 밀어주기가 꼽혔다. 익명을 원한 빙상연맹 관계자는 “예전엔 지도자 추천으로 특정 선수 밀어주기가 횡행했다. 선수들에게 특정 선수를 밀어주거나 경쟁 상대를 견제해줄 수 있냐고 제안한 뒤 이에 응하는 선수만 출전시키는 방식을 애용했다. 하지만 쇼트 트랙 저변이 넓어지고 각 팀마다 경쟁력 있는 선수가 자리잡으며 추천제가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 정착됐다. 그런데 갑자기 친한체대 인사들이 지도자 추천을 또 다시 들고 나와 빙상연맹 전체가 들썩였다. 최근 최민정 선수가 부각되자 한체대 쪽은 최 선수 경쟁자인 한체대 출신 심석희 선수 띄우기에 나선 정황”이라고 말했다.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의 폭로로 스피드 스케이팅 매스 스타트 종목에서도 지도자 추천제가 특정 선수 밀어주기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지난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매스 스타트 국가대표 선발 기준 5000m 3위를 기록했던 주형준 선수는 아시안게임 직전 이승훈 선수 페이스 메이커를 부탁하는 백철기 감독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주형준 선수 대신 5000m 선발전 5위 선수가 매스 스타트 선발 선수로 출전해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었다. (관련 기사)
이번에 수면 위로 올라온 피해자는 최민정 선수다. 그는 현재 연세대와 성남시청 소속이다. 최 선수는 한체대 소속 심석희 선수와 함께 과거 고교생 시절 한체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체대는 대학생 훈련이 끝나는 늦은 오후 초중고생 훈련도 병행한다. 두 선수 모두에게 한체대 특기생 제안이 있었지만 최 선수는 개인 사정으로 실업팀과 학업을 함께할 수 있는 연세대를 택했다. 한체대 특기생은 국립대 소속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실업팀과 이중 활동이 재학 4년간 불가능하다.
한체대 입장에서는 심석희 선수보다 좋은 기록을 냈던 최민정 선수를 연세대에 빼앗겨 또 다른 스타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올림픽 전까지도 심석희 선수의 기록은 최민정 선수를 넘어 서지 못했다. 국제빙상연맹 ISU 2017-2018 쇼트 트랙 세계 랭킹에 따르면 최민정 선수는 모든 종목에서 심석희 선수보다 순위가 높다. 최민정 선수는 500m 2위, 1000m 2위, 1500m 1위이고 심석희 선수는 500m 11위, 1000m 3위, 1500m 2위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가까워지는데도 심 선수의 기록이 좋아지지 않자 여자 쇼트 트랙 국가대표팀 조재범 코치는 심 선수를 구타해 무기한 직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한체대 출신 국가대표팀 코치진이 지도자 추천제 재도입 등 ‘행정 공작’과 폭행을 넘어 최민정 선수의 기록을 조작하면서까지 심석희 선수 밀어주기를 시도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국가대표 코치진이 최 선수 기록을 잴 때 결승점 통과 시점보다 초 시계를 더 늦게 누르는 방식이라는 증언이었다.
2017년 8월 9일 쇼트 트랙 국가대표팀 캐나다 캘거리 전지훈련에 동행한 한 빙상연맹 관계자는 “한체대 출신 조재범 코치가 최민정 선수의 기록을 조작했다. 심석희 선수가 들어오면 재빨리 누르고 최 선수가 들어오면 한참 있다가 초 시계를 눌렀다. 내가 기록한 시간과 코치진이 실제 잰 시간은 모두 1초 이상 차이가 났다”고 말했다. 입증할 수 있는 영상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전지훈련 당시 빙상연맹은 선수 기록을 재는 경기 ‘기록회’의 언론 공개를 거부했다. 다른 종목에선 기록회 촬영을 거부하는 경우가 없다. 당시 기록을 쟀던 심석희 폭행 코치 조재범 씨는 ‘일요신문’의 여러 차례 취재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평창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최민정 선수에게 손을 짚는 심석희 선수. 심 선수는 실격 처리됐다. SBS 중계방송 캡처.
2월 22일 열린 여자 쇼트 트랙 1000m 결승전 결과 심석희 선수는 실격 처리됐다. 이 경기에서 심석희 선수와 엮여 넘어진 최민정 선수는 이내 일어났지만 왼쪽 둔부가 아픈 듯 계속 만졌다. 그는 최근 MRI 검사를 받았다. 둘의 분위기는 묘했다. 2월 23일 강릉 올림픽 파크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쇼트 트랙 여자 대표팀 기자회견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감지됐다. 당시 최민정 선수는 “심석희 선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석희 언니와는 서운한 부분이 있어도 특별히 얘기할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훈련을 받아오던 또래 선수 사이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이유는 한체대의 스타 만들기 강박 때문으로 풀이된다. 메달이 나와야 한체대로 좋은 선수가 몰린다. 좋은 선수는 스타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한체대 출신 스타가 나와야 한체대는 지금의 카르텔을 유지할 수 있다. 한체대 빙상의 수장은 전명규 교수다. 그의 업적은 탁월하다. 빙상연맹 역시 실적을 가장 많이 내는 전명규 교수의 입맛에 따라 운영돼야 연맹 자체도 수월하게 유지 가능하다. ‘조직의 논리’에 선수는 수단 취급을 받는 셈이다.
이에 더해 빙상연맹의 임직원과 국가대표 코치진, 실업팀, 한체대가 전명규 교수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는 게 빙상계의 정설이다. 이유는 밥줄과 비호 탓이다. 빙상연맹은 실적을 근거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대한체육회를 거쳐 받는다. 실업팀은 한체대 소속 유명 선수를 손쉽게 영입할 수 있다. 한체대는 학교 홍보 효과를 누린다. 국가대표 코치진은 각종 국제대회 기간 외에 실업팀을 담당해야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전 교수의 직속 제자와 영향력 아래 있는 실업팀은 도청 2곳, 시청 2곳, 사기업 2곳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빙상 실업팀 가운데 절반이 넘는 숫자다.
여자선수 성추행했지만 전 교수의 비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A 코치가 취재진의 질문을 피해 자전거를 끌고 빙상장을 빠져 나가는 모습.
전명규 교수는 여전히 A 씨를 내치지 않았다. ‘일요신문’은 A 씨가 현재 한체대 빙상장에서 초중고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확인했다. 3월 7일 오후 3시 30분쯤 한체대 빙상장을 방문한 취재진은 선수 2명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A 씨를 빙상장 한편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취재가 시작되자 “이따 아이들 가르쳐야 한다”며 “나가 달라”고 말했다. 질문을 몇 개 던지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던 그는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빙상장 2층 빙상장 관람석에는 전명규 교수가 앉아 있었다. 그는 취재진을 보자마자 “그만 합시다. 최훈민 기자에게 한 거 모두 취하할 테니까”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지난해 9월 자신의 전횡을 보도(관련 기사)한 ‘일요신문’에 “기사를 삭제하라”며 두 달쯤 뒤 변호사를 거쳐 정정보도청구 내용증명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추가 취재가 이어지자 연락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취재진은 또 한체대를 찾았다. 전 교수는 곧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계속 답변을 요구하자 그는 문을 반쯤 연 뒤 향후 거취 등의 질문에 “아무 계획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문을 반만 열고 취재진을 맞이하는 전명규 교수.
대한체육회에 선수로 등록된 빙상 새싹만 초등학교 345명, 중학교 209명, 고등학교 137명 총 691명이다. 선수뿐만 아니다. 대한민국 빙상장은 총 38개다. 빙상장당 트랙을 도는 빙상 초중고 꿈나무는 약 30~50명 수준이다. 선수와 꿈나무를 모두 합치면 전국적으로 2000명을 훌쩍 넘는다. 전명규 교수는 1963년생으로 현재 55세다. 국립대학교 정년은 65세다. 향후 10년 동안 추가로 배출될 빙상 꿈나무는 최소 500명으로 추산된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한체대의 ‘스타 붙잡기’와 보복…빅토르 안은 또 나올 수 있다 “한체대는 밀어줄 땐 밀어주고 놓치면 반드시 보복한다.” 빙상계에서 유명한 말이다. 최민정 선수가 연세대 진학 뒤 받았던 방해 공작도 이런 보복의 한 종류다. 한체대와 등지면 설 곳을 잃기 쉽다. 안현수 선수는 러시아 귀화 이유로 늘 “설 곳이 없었다”고 말해 왔다. 안현수 선수는 한체대 졸업 직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졸업 뒤 실업팀을 가려고 했다. 안 선수는 당시 한체대의 최고 자랑거리였다. 안 선수를 붙잡아 두고 싶었던 전명규 교수는 당시 안 선수에게 한체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전 교수는 안 선수에게 “몇 년만 참고 기다리면 내가 딱 맞는 팀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빙상 종목 실업팀은 몇 없었고 전 교수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도 적었다. 안현수 선수는 전 교수의 제안을 거절했다. 2007년 12월 성남시청과 최고액인 5억 원 3년 계약을 맺었다. 한체대를 떠난 안현수 선수에게 시련은 곧장 찾아왔다. 성남시청 입단 한 달도 안 된 2008년 1월 태릉 선수촌에서 훈련 도중에 넘어져 무릎 부상을 입었다. 2008년 9월에 재활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 복귀했지만 국가대표 선발에 실패했다. 내리막길은 계속됐다. 2010년에 있었던 2010~2011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안현수 선수는 실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2011년 1월 1일 성남시청 실업팀은 해체됐다. 전명규 교수 눈밖에 난 안현수 선수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때 러시아 빙상연맹과 연결됐다. 당시 러시아 빙상연맹 아래는 이미 한국 선수 2명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안 선수는 이들과 연락하며 러시아 귀화를 타전했다. 안현수 선수는 “전명규 교수의 파벌 때문에 러시아 간 것 아니냐?”는 질문에 늘 “갈 곳이 없었다”는 말 외에 전명규 교수 탓을 하지 않았다. 전 교수의 편애로 자신이 기회를 얻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2002년 솔트 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전 교수는 국가대표 선발전도 안 나갔던 안 선수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당시 주니어를 휩쓸고 시니어 세계 랭킹 2위였던 이승재 선수 대신 안 선수가 경기에 출전했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