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눈치 보다가 자기 발등 찍힌 꼴…정보 노출 ‘꼬리’ 못잡으면 후폭풍 더 커질듯
지난 12일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은 2013년 하나은행 채용 과정에서 친구 아들을 추천한 의혹에 휘말리며 자진사퇴 형식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최 전 원장은 2012년~2014년 하나금융지주 사장을 지냈다. 당시 하나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는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이었다.
금융권 피감독기관의 ‘공작’으로 감독기관 수장이 낙마하는 사상 초유의 항명 파동이 벌어졌다. 사진 이종현 기자.
당초 최 전 원장은 채용비리 의혹이 제기된 지난 9일만 해도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정면 돌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최 전 원장은 지난 12일 오전까지 하나은행에 대한 채용비리 엄단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불과 한나절 만에 전격 사의를 표명하면서 금융감독원(금감원)과 하나금융 간 ‘파워게임’의 방아쇠를 당겼다. 금융권 안팎에선 평소 ‘민폐’를 경계하는 최 전 원장이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청와대 의중을 묻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이란 말이 나온다.
최 전 원장은 지난해 9월 문재인 정부 초대 금감원장에 내정되면서 내부 적폐 청산을 약속했다. 같은 달 감사원은 금감원에 대한 집중 감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과정에서 직원들의 주식 차명 거래와 채용 비리 사실이 불거졌다. 청와대 역시 감사원이 다루지 않은 금감원 고위 간부의 ‘갑질’ 정황 등을 내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최 전 원장은 지난해 11월 부원장 4명을 포함한 임원 전원을 교체하는 ‘강수’로 금감원 쇄신의 ‘닻’을 올렸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의 금감원 개혁은 암초에 부딪혔다. 금융권은 하나금융 출신 최 전 원장의 ‘중립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금감원 내부에서조차 최 전 원장의 배후에 ‘이명박 정부 금융 4대 천왕’으로 알려진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금융 안팎에선 현 정부 실세로 알려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중심으로 김승유 전 회장, 최 전 원장을 잇는 이른바 ‘K(경기고·고려대) 라인’이 있다는 루머가 확산됐다. 하나금융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전부터 김정태 회장이 김승유 전 회장을 견제해왔기 때문에 최흥식 전 원장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청와대는 금융권 내부적으로 지난 정부 당시 문제를 일으킨 금융그룹 수장이 자진해서 물러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감원은 먼저 지난해 11월 하나금융 출신 내부 임원(부원장보)을 정리하면서 특혜 시비를 없앴다. 채용 비리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도 같은 달 사임했다. 그러나 김정태 회장은 임기 중 사임할 만한 실책이 없다는 이유로 3연임을 강행했다. 김 회장은 올 초 사석에서 “(청와대와 가까운) 특정 세력이 자신을 음해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35 하나은행 사옥. 사진 최준필 기자.
이 무렵 금융권에선 하나금융이 최 전 원장의 과거 재직 시절 인사 자료, 법인카드 사용 내역 등을 검토하고 있으며, 정치권을 통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산됐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당시엔 웃어넘겼는데 지금 와서 보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하나금융은 “(뒷조사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또 하나금융은 채용비리 전수조사 당시 ‘내부 확인 결과 채용 비리는 없었다’는 내용을 금감원에 회신했다. 이는 정부가 공공기관 채용 비리 실태를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143건의 채용 비리를 적발한 것과 대비됐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우리은행에서만 16건의 채용 비리가 발견됐는데 다른 은행은 단 한 건도 없다는 결과를 (청와대가)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최근 채용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KB국민은행은 서류, 필기, 면접 전형 등에서 190여 명의 당락이 뒤바뀐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금융 노조에 따르면 지난 금융권 채용비리 조사는 최근 3년간(2015~2017년) 진행된 전형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당시 하나금융은 채용 관련 서류를 파기해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번 최 전 원장의 채용 청탁 시점은 2013년이다. 허권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죄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지만 김정태 회장 3연임 결정이 2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불거진 이번 의혹의 배경에 관해선 누구라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 전 원장 사임 후 금감원은 자체 특별검사단을 꾸리고 지난 13일 하나금융과 하나은행에 대한 특별검사에 돌입했다. 검사 기한은 채용비리 의혹이 완전히 규명될 때까지며 김 회장의 3연임이 확정되는 하나금융 주주총회일(오는 23일)이 지나서도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하나금융에 대한 특별검사에 돌입한 것은 맞다”며 “(언론에) 하나금융과 갈등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금감원 사정에 밝은 다른 인사는 “베테랑 직원들이 그야말로 이를 갈고 있다”며 “최 전 원장이 아닌 조직의 자존심을 걸고 의혹을 밝힌다는 각오”라고 전했다.
그러나 금융권에선 금감원의 이번 특별 검사가 실패로 끝날 경우 또 다른 후폭풍이 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미 금감원은 문재인 정부 들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차명계좌 조사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기업에 대한 회계 감리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금융의 아이카이스트 특혜 대출 의혹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사실상 면죄부를 내린 바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ISS가 찬성…김정태 하나금융 회장 3연임 파란불?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3연임을 결정짓는 주주총회가 오는 23일 열린다. 최근 채용비리 의혹으로 금융감독원의 특별검사를 받고 있는 하나금융은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 퇴진과 이번 주주총회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이번 일로 오히려 우리(하나금융)가 곤경에 처했다”며 “시중에 나오는 얘기(배후설)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세계적인 의결권 자문사 ISS가 김 회장의 연임에 찬성한 것은 김 회장에게 호재다. ISS 보고서는 주로 외국인 기관 투자자가 주총 찬반 투표 시 참고자료로 쓰는데 하나금융은 외인 지분율이 절반을 훌쩍 넘는다. 변수는 진행 중인 특별검사에서 김 회장이 연루된 채용비리 정황이 나올 경우다. 앞서 하나금융 노조는 김 회장 친인척이 연루된 채용비리 의혹과 특혜대출 의혹 등을 제기한 바 있다. 반면 국내 민간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는 지난 15일 ISS의 의견과 반대로 김 회장의 3연임 반대 권고를 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ISS 권고가 찬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가 변수”라며 “3연임이 확정되더라도 금융당국과 갈등은 당분간 해소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