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당한 데 분노 느껴…주민들 “평소 일 잘하고 노인들한테도 정말 잘했는데…” 충격
상주 ‘농약사이다’, 청송 ‘농약소주’ 사건에 이어 또 한 번의 농약 사건이 조용한 시골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경상북도 포항 남구의 한 어촌마을에서 60대 여성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으려고 끓여놓은 고등어추어탕에 농약을 넣은 것. 4월 23일 포항 남부경찰서는 범인으로 지목된 전 부녀회장 이 아무개 씨(여·68)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씨의 평소 성품과 행동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나타낸다.
4월 23일 경상북도 포항시 한 어촌마을의 전 부녀회장 이 아무개 씨가 마을주민들이 함께 먹을 예정이었던 고등어탕에 농약을 넣은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박혜리 기자
사건이 발생한 포항 마을은 문어 특산지로 4월 21~22일 이틀에 거쳐 돌문어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부녀회는 축제 개막 전날인 20일 저녁, 마을 공동작업장에서 다음날 주민들과 나누어 먹을 고등어추어탕을 끓였다. 고등어추어탕은 경상도 일대 바닷가 마을에서 즐겨 먹는 별미다.
4월 21일 오전 고등어추어탕을 살짝 미리 맛본 마을 주민은 깜짝 놀랐다. 음식에서 악취가 나고 구토 증상이 나타나 바로 뱉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 마을 주민은 오전 6시 10분경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포항남부경찰서 관계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고등어추어탕에서 살충제 성분인 엘산이 검출되었다”며 “살충제를 먹는다고 바로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삼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의 건강에 이상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저독성 농약인 엘산은 특유의 냄새가 강해 노루와 같은 야생동물이 농작물에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 마을 주민은 “맛을 본 사람이 유독 민감해서가 아니라 그 농약은 워낙 냄새가 심해서 어차피 삼키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12시간 만에 범인은 지난 3년 동안 이 마을의 부녀회장을 역임했던 이 씨로 밝혀졌다. ‘농약소주’, ‘농약사이다’ 등 시골 마을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벌어진 농약사건들이 미제사건이 될 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빨리 범인이 잡힌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4월 21일 새벽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공동작업장에 있던 고등어탕에 농약을 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CCTV의 역할이 중요한데 유사 사건들과 달리 다행히도 CCTV 자료가 있었고 차량 블랙박스, 주민 탐문수사를 통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다”며 “고등어탕에서 검출된 성분과 인근 텃밭에 버려진 자양강장제 병 안의 액체, 이 씨 자택에 있었던 종이컵 안의 액체가 모두 일치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최근 마을 부녀회원들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은 고등어추어탕이 조리된 공동작업장 내부 모습. 박혜리 기자
이 씨의 남편 역시 현재 마을에서 노인회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부부는 마을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마을 이장은 “(이 씨의) 남편도 경찰이 제시한 CCTV 자료를 보고 영상 속 인물이 자신의 아내임을 인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조용했던 시골 마을이 이런 일로 뉴스에 오르내릴지 상상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경찰은 이 씨가 부녀회원 일부가 자신을 무시하고 마을 일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분노를 느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부녀회장을 연임한 이 씨는 지난달 임기를 남기고 스스로 부녀회장직에서 내려왔다. 부녀회원들은 주로 40~60대로 노인 인구가 대부분인 이 마을에서 비교적 젊은 연령대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부녀회원은 “(이 씨는) 평소 노인들과 친했고 우리와는 크게 교류가 없었다”며 “우리가 누구를 따돌릴 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씨의 평소 태도와 성격을 볼 때 이번 사건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낸다. 자칫 대형 인명사고로 번질 수 있었던 아찔한 사건이 터졌지만, 마을 내부에서 한순간에 범죄자가 된 이 씨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까닭이다. 한 마을 주민은 “부녀회장으로서 일도 잘했고 평소 성격도 활달했다. 특히 노인들에게 정말 잘해서 신임을 얻었다”고 말했다. 80대 마을 주민은 “(이 씨가) 그동안 우리한테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가족 같았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에 주민들은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한 마을주민은 “타지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연락이 계속 온다”며 “내가 그 음식을 먹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기자가 마을을 방문한 4월 24에는 포항 남구보건소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 검사가 진행됐다. 보건소 관계자는 “노인 인구가 대부분인 마을에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터진 만큼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기준에 체크하도록 하고 조사 결과 문제가 발견되는 경우 추가적인 검진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