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 권익 강화’ 찬성론…‘투기자본에 악용’ 반대론도 거세
집중투표제란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이사 수와 동일한 수의 의결권을 갖는 제도다.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현재는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갖지만 집중투표제를 실시하면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가질 수 있다. 가령 3명의 이사를 선출한다면 지금은 1주를 갖고 있는 주주가 1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집중투표제에서는 3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3표를 모두 몰아줘도 된다. 집중투표제에서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이사에게 의결권을 몰아줘 선임할 수도 있다.
이처럼 집중투표제는 소수주주들의 권익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계 펀드들의 경영권 공격에 취약해질 우려도 있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가 지배구조개편을 추진 중인 현대차그룹에 집중투표제를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현대차와 삼성전자를 공격하고 나선 가운데, 국민연금이 최근 ‘집중투표제’를 도입한다고 밝히며 논란에 휩싸였다. 박은숙 기자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연)은 지난해 2월 ‘집중투표제 도입 시 이사회 구성 주요 기업의 시뮬레이션’ 보고서를 통해 집중투표제가 도입될 경우 매출액 기준 10대 기업 중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4곳이 외국계 투자기관이 선호하는 이사 최소 1인을 선임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한경연은 2006년 ‘KT&G-칼 아이칸’ 사태를 예로 들며 “헤지펀드가 이사회에 한 명의 이사를 포함시켜 문제가 발생한 바 있다“며 ”한 명의 이사가 경영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했다.
‘KT&G-칼 아이칸’ 사태는 미국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다른 헤지펀드와 연합해 집중투표제를 채택했던 KT&G 이사회에 사외이사 1명을 진출시키고 경영권을 흔들었던 사건이다. 당시 칼 아이칸은 장기사업을 위해 보유하던 부동사 매각과 자사주 소각, 자회사 한국인삼공사의 기업공개 등을 요구했다. 결국 KT&G는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2조 8000억 원을 투입해야 했고, 칼 아이칸은 2006년 12월 주식매각 차익 1358억과 배당금 124억 등 1482억의 이익을 실현하고 떠났다.
김윤경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집중투표제는) 소수주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소수주주 의견과 권익보다 2대, 3대 주주나 외국계 투기자본에 악용된 경우가 있다“며 ”미국의 한 투자펀드의 경우 투자지침서에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기업에 투자 금지를 규정하고 있을 정도”라고 우려했다. 김 연구위원은 “국내 기업 지분이 많은 국민연금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텐데, 스튜어드십 코드나 집중투표제 등을 도입할 때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집중투표제를 항상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반대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며 “이번에 개정된 의결권행사 지침 내용은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것이 아니라 주주총회에서 이사 선임 시 집중투표를 사용하도록 하는 안건이 상정된 경우 국민연금도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집중투표제를 활용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경영 개입을 최소화하며 ‘주총 거수기’ 역할을 자처해왔다는 비난을 받은 국민연금이 문재인정부 들어 다소 급격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국민연금은 오는 7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있는 듯 주주권 강화를 위한 여러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지난 1일에는 배당성향이 낮은 ‘저배당 블랙리스트 기업’으로 남양유업과 현대그린푸드를 지목하기도 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대한항공 갑질 사태에 커지는 국민연금 존재감 대한항공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이 검찰 수사로 이어지면서 국민연금의 역할론이 부각되고 있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 오너 일가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4월 25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오너 일가의 퇴진을 요구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이 쏟아졌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지분을 각각 11.81%, 12.45% 보유한 2대 주주다. 한진그룹 오너 일가는 한진칼 지분 24.79%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제2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서 “대한항공 경영진의 일탈 행위는 회사 주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주주인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성을 하락시키는 요인”이라며 “투명하고 독립적인 주주권을 행사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 기금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의의”라고 전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박 장관은 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남에서 “논란이 기업가치에 준 영향을 특정하는 게 쉽지 않다. 국민 정서상 큰 문제지만 국민연금 전체 자금을 놓고 보면 비중이 크지 않다”며 “섣불리 개별 사안에 대해 움직였다 큰 것을 놓칠 수 있어 진중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J&Partners 법률사무소는 대한항공 주주들을 대상으로 위임장을 받고 대한항공에 주주명부 열람을 청구하는 등 주주총회 개최를 추진 중이다. 법률사무소 관계자는 “대한항공을 좌지우지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정작 회장 일가의 지분은 시가총액 11%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