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기관 적극 행보…‘섀도보팅’ 폐지로 상장사 ‘소액주주 모시기’
지난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참석자들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주총시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올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국내 다수 기업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과거 경영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며 ‘주총 거수기’ 역할을 자처해왔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올해 주총에서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국민연금은 지난 22일 열린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 최치훈 대표를 포함한 4명의 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주총 하루 전인 21일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열고 “삼성물산 측 4명의 이사 후보가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계획 승인을 결의한 이사회 구성원이었다“며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수행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고 반대를 결정했다. 앞서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지분 11%를 보유한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치훈 대표를 비롯한 주요 임원의 이사 선임 등 총회에 상정된 4건의 안건은 통과됐다. 합병 이후 국민연금의 지분이 5.7%로 줄어든 탓이다. 주총에 상정된 안건이 통과되려면 출석 주주의 의결권 과반수와 발행주식 총수 4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된다. 삼성물산 지분은 특수관계인인 삼성 총수 일가가 39%를 소유하고 있으며, 삼성의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KCC가 8.97%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또 KB금융지주의 정관변경 안건과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 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국민연금은 KB금융의 지분 9.62%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국민연금은 5년 이내 공직자와 당원은 이사 선임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은 정관변경 안에 대해 “다양한 경력과 능력을 갖춘 이사 선임을 지나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외이사 선임 건에 대해서는 “KB금융지주의 권순원 후보 사외이사 선임 건은 현재 KB금융 이사회의 구성상 주주 제안에 따른 주주가치 제고가 불분명하다“며 ”적정 비율의 사외이사 구성이라는 의결권 지침 취지 등을 감안해 반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23일 열린 KB금융 주총에서는 국민연금의 뜻대로 두 안건 모두 부결됐다.
지난해 말 의결권 대리행사제도인 ‘섀도보팅’(그림자 투표)이 폐지된 것도 올해 주총 풍경을 바꾼 요인으로 꼽힌다. 상장사들은 정족수 미달로 주총 안건 통과가 불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안을 강구하느라 분주했다. 섀도보팅이란 의결정족수가 부족할 경우 주총에 불참한 주주들의 투표권을 한국예탁결제원이 참석한 주주의 찬성·반대 비율에 맞춰 대신 행사해 투표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1991년 국내 도입됐으나 소액주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기업들의 주총 활성화 노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섀도보팅 폐지로 과거 외면받기 일쑤였던 소액주주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커졌다. 의결정족수를 채워야 하는 기업들이 ‘소액주주 모시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전자투표제를 도입하거나 의결권 행사를 독려하는 등 주총 참석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주 편의를 위해 자체적으로 주총 개최일을 분산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섀도보팅 폐지의 부작용이 속출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의결정족수 미달로 일부 안건을 의결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실제 지난 9일 영진약품 주총에서는 소액주주들의 참여율 저조로 감사위원 선임 안건 의결이 부결됐다. 감사위원 선임 안건의 경우 의결권이 있는 전체 지분 가운데 25% 이상 찬성표를 확보해야 통과되며, 대주주 의결권은 최대 3%로 제한돼 있다.
소액주주 지분이 47.55%를 차지하는 영진약품은 이 같은 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총 전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영진약품 측은 전자투표와 의결권 대리 권유하는가 하면, 영업사원 100여 명을 동원해 소액주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부상 주소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아 주주들과 접촉이 쉽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소액주주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상장사들의 경우 ‘3% 룰’에 따라 감사 및 감사위원 선임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이에 해당하는 상장사는 올해 93개사, 내년 199개사, 내후년 224개사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들이 주주들과 꾸준히 소통활동을 해야 하며 전자투표제와 전자위임장 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투자자들도 단기투자보다 장기투자로 인식을 전환해 기업에 관심을 갖고 주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기업 전자투표제 미온적인 까닭? ‘섀도보팅 부활하겠지’ 기대 금융당국은 섀도보팅 대안으로 전자투표제도를 독려한다. 전자투표제란 주주총회가 열릴 때 주주가 현장에 참석하지 않고 외부에서 인터넷으로 접속,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0일 개최한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제를 실시했다.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이번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주식 수는 총 발행 주식의 80.7%인 7468만 3693주로 지난해 대비 169만 주가량 증가했다. 이 가운데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한 주식 수는 77만 주이며, 주로 소액주주였다. 그러나 SK를 제외한 다수 대기업은 여전히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1947개 상장사 중 전자투표제를 실시키로 한 기업은 250개에 그쳤다. 기업들이 섀도보팅 폐지에 따른 어려움만 토로할 뿐 주주들의 참여 확대를 유도하지 않은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섀도보팅이 폐지된다고는 했지만 실제 기업들은 제도 부활에 대한 기대가 있어 전자투표제에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주총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더 많은 기업이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는 등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