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들 새해소망 그대로만 됐으면…
▲ 이명박 대통령이 1일 현충문 옆에 비치된 방명록에 “일로영일(一勞永逸)의 마음으로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닦겠습니다”라는 신년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연합뉴스 | ||
지난 2008년 초 당선자 신분으로 첫해를 시작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내놓은 신년휘호는 ‘시화연풍’(時和年風)이었다. ‘시화연풍’은 성군(聖君)의 치세에 비유되는 말로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 주호영 이명박 대통령당선자 대변인은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국민이 화합하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취임식 때 특별히 시화연풍을 주제로 한 공연까지 준비했었다. 하지만 휘호의 의미와는 달리 이 해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강부자 내각’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면서 시작된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불거진 ‘촛불정국’으로 연말까지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야 했다. “대통령이 내놓는 화두는 예언과도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는데 2008년 한 해는 이 대통령이 내놓은 화두와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갔던 셈이다. 매해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내놓는 <교수신문>은 그해 말 이명박 정부에 대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라고 평했다. ‘병이 있는데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의미. 대통령을 향해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비판과 충고를 받아들이라는 주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2008년 신년휘호와 다르게 정국이 흘러간 탓인지 2009년을 시작하면서는 보다 신중히 휘호를 선택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내놓았던 것은 ‘부위정경’(扶危定傾:위기를 맞아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휘호에 대해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이 사자성어는 <주서-이기전>의 ‘태조 부위정경, 위권진주’(太祖 扶危定傾, 威權震主)에서 따온 말로 ‘위엄과 권위를 떨쳐 왕을 두렵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이 휘호에 대해 일각에서 “군왕의 위엄과 과도한 국가기강 확립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던 것. 당시 이 대통령은 “국가정체성을 훼손하는 폭넓고 뿌리 깊은 상황이 있다”고 언급하며 대대적인 개혁 작업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한천작우’(旱天作雨)라는 휘호를 발표해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도 했다. 이 말은 맹자의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편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어지러운 세상이 계속되고 백성의 도탄이 지속되면 하늘은 백성의 뜻을 살펴 비를 내린다’는 의미.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국민들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교수신문>은 그해 말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운불우’(密雲不雨: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비가 오지 않는 답답한 상황)라는 사자성어를 내놓기도 했다.
유력한 차기 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간간이 신년 화두를 통해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왔다. 미니홈피를 통해 직접 글을 올리고 있는 박 전 대표는 얼마 전 초기화면에 ‘경인년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시고 기쁨과 희망이 넘치시길 기원드립니다’라는 새해 인사를 남겼다. 박근혜 의원실 측은 “직접 새해 인사를 남기신 것이다. (올해에는) 이외에 별도로 4자 성어와 같은 휘호는 하실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달리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특별한 신년휘호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메시지 정치’의 달인으로 불릴 만큼, 간혹 미니홈피를 통해 ‘뼈있는’ 메시지를 내놓곤 했다. 특히 지난해 6월 현충일을 맞아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글은 의미심장했다. 박 전 대표는 “저는 오늘, 전에 본 영화 속의 한 대사가 기억났다”며 “누군가가 신에게 인내를 달라고 하면 신은 인내를 주실까요,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라는 영화 속 대사를 인용했다. 이어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신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면 신은 그런 마음을 주실까, 그런 마음을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 자랑스러운 나라를 달라고 하면 자랑스러운 나라를 주실까,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 기회를 주실까”라고 덧붙였다.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 기회를 주실까”라는 대목은 유독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박 전 대표가 우회적으로 대권을 향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 2007년 초 그가 신년화두로 내놓았던 ‘대처리즘’도 대권주자로서의 각오와 무관치 않았다. 당시 이명박 후보와의 경선을 앞두고 있던 박 전 대표는 사실상 대선출정식이라 할 수 있는 신년인사회에서 “영국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치유해서 도약을 이룩한 것처럼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중병을 고쳐놓겠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는 우리나라 상황이 대처가 총리에 오르던 70년대 말 영국 상황과 비슷하다면서 대처리즘을 내놓았지만, 그가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대권주자이기에 이 화두가 주는 메시지는 남달랐다.
그런가 하면 사회통합위원장으로 정계에 복귀한 고건 전 총리 역시 대권후보 시절 신년화두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바 있다. 지난 2007년을 맞이하며 고 전 총리는 주역에 나온 ‘운행우시’(雲行雨施:구름이 움직이니 시원하게 비가 뿌린다)를 신년 화두로 제시했다. 당시 고 전 총리 주변에선 통합 신당설이 나오고 있던 상황이어서 이와 같은 신년화두는 의미심장했지만, 결국 신년화두와는 달리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과 노무현 전 대통령 | ||
역대 대통령들 역시 신년휘호나 화두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곤 했다. 신년휘호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마다 정초에 신년휘호를 직접 붓으로 써서 발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구경서 강남대학교 교수는 논문을 통해 이를 분석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신년휘호는 정치적 구호를 전달하는 중요한 선전수단이었다는 게 그의 얘기. 구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 5개월을 집권하면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년휘호를 발표했다. 첫째, 한국국민들에게 의미가 깊은 정월 초하루에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선전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둘째, 국민들의 의식일체화를 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한국적 정서가 담긴 붓글씨로 발표함으로써 국민들과 좀 더 가까이 하는 정치지도자라는 의미를 심어줄 수 있었다. 넷째, 향후 1년간 있을 국가목표 또는 정치목표 등을 간단한 메시지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 ||
김영삼 전 대통령도 신년휘호를 즐겨 썼는데 특히 애용했던 휘호는 ‘대도무문’(大道無門:정도를 걸으면 거리낄 것이 없다). 이것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통역관을 맡았던 박진 의원이 이 휘호를 선물 받은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자 “A freeway has no tollgate(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 이 위트에 클린턴 대통령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다시 “Righteousness overcome all obstacles(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라고 통역했다고 한다(<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송국건 저·네임북스).
한편 매해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하고 있는 <교수신문>은 2009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비유한 사자성어로 ‘방기곡경’(旁岐曲逕:바른 길을 좇아 정당하게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 억지로 한다)을 선정한 바 있다. 또한 각 대학교수, 칼럼니스트 등 216명의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010년 새해의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로는 ‘강구연월’(康衢煙月:태평성대의 풍요로운 풍경)이 꼽혔다. 정치인들의 ‘바람’이 담긴 신년화두와 한 해가 지난 뒤 국민들이 실제로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 대통령이 선택한 새해 화두는 ‘일로영일’(一勞永逸). ‘지금의 노고를 통해 이후 오랫동안 안락을 누린다’는 뜻이다. 새해 연말께 우리는 과연 어떤 ‘사자성어’를 만나게 될까.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