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구씨 형제, 암흑기에도 아낌없이 팍팍…두산 박정원, 포스트시즌 땐 잠실구장 ‘죽돌이’
향년 73세로 타계한 고인은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LG 트윈스로 재창단하는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2007시즌을 끝으로 동생인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넘기기까지 18년간 야구단에 남다른 애정과 지원을 보낸 것으로 유명했다. LG는 초대 구단주의 아낌없는 투자 속에 창단 첫 해인 1990년과 4년 뒤인 1994년에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도 일궜다.
KBO 리그에 큰 족적을 남긴 고인의 별세에 야구계도 슬픔에 빠졌다. LG는 구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당일 경기에서 응원단 앰프를 사용하지 않고 치어리딩도 취소했다. 원정팀 한화 역시 LG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추모에 동참했다. 또 LG 선수들은 유니폼 소매에 검은색 근조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검은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는 ‘농군 패션’으로 승리를 향한 의지도 표현했다. 한화에 5연패 중이던 LG는 이날 역전승을 올렸다. 세상과 작별한 구 회장에게 마지막으로 승리를 선물했다.
유니폼 소매에 검은색 근조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산 LG 선수들. 사진= LG트윈스 홈페이지
# 고 구본무 회장이 남긴 우승주와 명품시계
고 구본무 회장은 LG 구단주를 역임하는 동안 1년에도 수차례씩 직접 경기장을 찾아 야구단을 응원했다. 매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진행되는 LG 스프링캠프를 찾아 선수단을 격려했고, 경남 진주 단목리에 있는 외가로 LG 선수단을 초청하는 ‘단목 행사’를 열어 우승 기원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백인천 LG 초대 감독은 LG가 창단식을 열었던 1990년 3월 15일, 고인과 처음 만난 순간을 38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백 감독이 “야구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자 구 회장은 곧바로 “내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느냐”고 물었다. 백 감독은 “첫 만남에서의 첫 마디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회상했다.
구본무 회장 생전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LG가 야구를 잘 하든 못 하든 구단주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창단 첫 해부터 4월 6연패, 5월 7연패 늪에 빠진 LG가 6월 들어 꼴찌로 처졌지만, 구본무 회장은 오히려 식사 자리를 만들어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을 격려했다. 당시 LG 선수였던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구본무 회장님이 백인천 감독님께 ‘주변 이야기에 너무 흔들리거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야구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독려했다”고 귀띔했다.
백인천 감독도 “당시 동계훈련을 엄청 혹독하게 치른 탓에 초반 성적이 안 좋았지만, 구 회장님께서 ‘괜찮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며 “야구단 성적에 대해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도 야구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떠올렸다. LG는 그해 6월 8연승을 달리며 상승세를 탔고, 전반기를 4위로 마쳤다. 정규시즌 우승을 최종전에서 확정했고,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4승 무패 파죽지세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구본무 회장은 1990년대 프로야구 발전에도 여러 가지 공헌을 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처음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도 LG였고, 2군 선수들을 위한 전용 훈련장도 LG가 가장 먼저 세웠다. 선수들의 연봉 상한선을 폐지한 것도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80년대 프로야구 선수들은 직전 시즌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최대 25%까지만 연봉을 올려 받을 수 있었다. 일례로 MBC 김건우는 1986년 1200만 원을 받고 18승을 올렸지만, 이듬해 연봉이 불과 300만 원 올랐을 정도다. 당연히 스타 선수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고, 구단들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보너스 형식의 ‘뒷돈’을 따로 챙겨줘야 했다. 구본무 회장은 1990시즌 LG가 우승한 뒤 이 규정을 앞장서 깨트렸다. 그동안 망설이던 다른 구단들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왔다. 백 감독은 “우승 축하연에서 구단주께서 ‘어떻게 축하를 해주면 되겠나’라고 물으셔서 ‘월급을 많이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진짜로 선수단 연봉이 많이 올랐다”고 귀띔했다.
초대 구단주는 세상을 떠났지만, 경기도 이천에 있는 LG챔피언스파크 구단 사료실에는 여전히 고인의 숨겨진 유산 하나가 남아 있다. 23년째 개봉하지 못하고 있는 우승주다. 구 회장은 1994년 오키나와 스프링캠프를 방문했다가 회식 자리에서 지역 특산주인 아와모리 소주를 마셨다. “올 시즌 우승을 하면 이 술로 다시 건배를 하자”고 제의했다. 실제로 LG는 그해 우승했다. 그러자 구 회장은 이듬해인 1995년 다시 아와모리 소주를 사왔다. “다음 우승 때 또 마시자”며 술독에 담아 놓았다. 하지만 그 후 23년간 그 술독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술독을 싸놓은 종이는 누렇게 변했지만, 독을 흔들면 술이 물결치는 찰랑찰랑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1990년 창단 우승 당시 LG트윈스. 연합뉴스
이뿐 아니다. 20년째 LG 구단 사무실 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롤렉스시계도 구 회장의 유품이나 다름없다. 고인이 1998년 해외 출장을 떠났다가 LG의 세 번째 우승을 기원하면서 구입해온 명품 시계다. 당시 돈으로 8000만 원 상당인 이 손목시계를 내밀면서 “다음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게 이 시계를 선물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손목시계를 선수의 손목에 채워주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롤렉스시계가 들어 있는 금고를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LG의 우승밖에 없다.
# 잠실 라이벌 LG와 두산, 오너 일가 사랑 속에 컸다
구본무 회장에 이어 LG 두 번째 구단주가 된 구본준 부회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야구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구 부회장은 야구 명문고인 경남고 출신이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회인 야구팀 선수로 직접 활약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한다. LG 홈경기를 자주 찾아 관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2군 훈련장도 종종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한다. 한 야구 관계자는 “대부분의 구단주들이 1군 경기도 잘 보러 오지 않는데, 2군 경기까지 챙겨 보는 구단주는 구 부회장이 유일할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고 있는 구본준 LG그룹 부회장. 연합뉴스
2012년 LG전자가 대당 90만 원 안팎에 이르는 고가의 스마트폰을 출시하자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전원에게 휴대폰 95대를 쾌척한 이력도 있다. 당시 구 부회장은 “1군 선수뿐 아니라 2군 선수들도 모두 스마트폰을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달라”고 신신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안 하위권에 머물던 LG가 2011시즌 중반까지 4강권을 유지하며 여름을 맞자 선수단 전원에게 한약을 챙겨주기도 했다.
구 부회장의 야구에 대한 애정은 트윈스 구단에만 그치지도 않는다. 사실상 한국 여자야구의 ‘선구자’로 활약하고 있다. 구 부회장이 속한 ‘경남고 동기회’ 야구팀이 LG 2군 연습장에서 여자야구 수도권연합팀과 꾸준히 교류전을 치르면서 인연을 맺은 게 계기였다.
구 부회장은 식사 자리에서 여자야구 선수들에게 “점점 여자야구에 관심을 갖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곧바로 국내 최대 규모의 전국대회인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를 창설했다. 기존 여자대회 후원금보다 무려 20배나 많은 돈을 내놓으며 대회 규모를 점점 더 키워나갔다. 2010년 세계여자야구월드컵에 출전한 한국여자야구대표팀을 위해 LG 2군 연습장을 섭외해주기도 했고, 급기야 직접 국제 대회까지 만들어 전 세계 여자야구 선수들을 한국으로 불러 모았다. LG배 대회는 어느덧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매년 여자야구 선수들이 가장 기다리는 최대의 축제로 발돋움했다.
LG와 한 지붕을 쓰는 잠실 라이벌 두산도 오너 일가의 관심과 지원 속에 성장해왔다. 2009년부터 두산 구단주를 맡은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역시 ‘야구광’ 가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 평소 야구장을 가장 많이 찾는 구단주로 유명하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매일 야구 결과와 뉴스를 체크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특히 포스트시즌 때면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를 직접 찾아와 관전한다.
박 회장은 VIP석이 아닌 관중석에서 야구를 보고, 두산 팬과 어울려 응원가를 부른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두산 팬들이 쓰는 응원 머리띠를 직접 착용하고 환호하는 모습이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두산 소속 선수가 중요한 기록을 세우면 직접 꽃다발을 보낼 정도로 세심한 애정을 표현하고, 팀이 초반부터 크게 뒤져 패색이 짙을 때도 경기 종료 순간까지 야구장을 지켜 더 박수를 받았다. 2014년 루 게릭 병 환자들을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이어질 때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거리낌 없이 릴레이에 참여했다. 구단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지만, 팬들의 눈높이에서 함께하는 구단주다.
두산 박정원 회장이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야구단 운영에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박 회장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힌다. 한 번 신뢰한 전문가가 있으면 단기간의 실패에 신경 쓰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끝까지 지지를 보낸다. 야구단의 운영은 구단 내부를 속속들이 파악한 ‘전문가’에 의해 진행돼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지난 시즌 중반까지 프런트의 수장이었던 김승영 전 두산 사장과 김태룡 현 단장이 박정원 구단주의 믿음 속에 최강팀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양키스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 생전 ‘승리 집착러’ 악명 자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구단주는 누구일까. 아마도 많은 야구팬이 조지 스타인브레너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스타인브레너는 ‘제국을 만든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970년대 이후 양키스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양키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지만, 그만큼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악명도 높았다. “나는 지는 게 정말 싫다. 정말, 정말, 정말 싫다”나 “승리는 숨 쉬는 것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 숨을 쉰다면, 이겨야 한다”와 같은 명언(?)도 남겼다. 그의 성격을 한 줄로 압축해 주는 발언들이다. 스타인브레너는 돈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가 오하이오에서 해운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집안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직접 입사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출한 것도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구단을 소유하고 싶다는 꿈을 꿨고, 결국 1973년 CBS에 1000만 달러를 내고 양키스 구단주가 됐다. 이후 폭풍 같은 투자를 통해 외부 FA를 대거 영입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결국 구단주가 된 지 3년 만인 1976년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77년과 1978년에는 월드시리즈를 2연패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메이저리그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스타인브레너가 구단주를 맡은 첫 23년 동안 양키스를 거쳐 간 감독이 총 20명이다. 단장도 재임 기간 동안 무려 11번이나 교체했다. 구단 경영은 물론 선수단 운영까지 일일이 관여해 ‘보스’로 불리기도 했다. 1990년엔 데이브 윈필드에게 약속했던 리그 최고 연봉을 조금이라도 덜 주기 위해 선수 뒷조사를 지시했다가 당시 페이 빈센트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에게 적발돼 영구 제명되기도 했다. 빈센트 커미셔너가 물러난 1993년에야 구단주 권리가 복권됐다.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그의 독선적인 스타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팬들은 오직 ‘승리’를 추구하는 구단주 스타인브레너를 미워하지 않았다. 양키스도 점점 명문 구단의 위용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1992년을 기점으로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버니 윌리엄스 등이 대거 팀의 간판으로 성장했다. 2004년엔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해 완벽한 ‘스타 군단’을 완성했다. 그 당시 감격한 양키스 팬들은 홈 개막전에서 ‘고마워요 조지’ ‘우리는 조지를 사랑한다’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단체로 흔들었다. 철인 같던 스타인브레너도 그 광경에 감격해 눈물을 쏟았다는 후문이다. 그가 2008년 건강 악화로 막내 아들 핼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 때까지, 35년간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6회 우승, 아메리칸리그 11회 우승의 위업을 쌓았다. 양키스 팬들은 2009년 개장한 새 양키스타디움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지은 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