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g만 무거워져도 선수는 바로 알아채…이승엽배트·심정수배트 한때 유행하기도
야구 규약 ‘배트 공인 규정’ 4조 2항에는 ‘표면에 도포하는 도료는 자연색, 담황색, 다갈색, 검은색에 한하며 반드시 나무의 결이 보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나뭇결이 보여야 배트를 임의로 개조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료가 지나치게 두껍게 칠해져 있으면 타구 반발력에도 미세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지방 한 구장에서 일부 타자의 배트 도료가 지나치게 진해 나뭇결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고, 발 빠르게 전 구장에서 배트 검사가 진행됐다.
# 갑자기 ‘부적격 배트’가 화제에 오른 이유
검사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 심판위원들은 5개 구장에서 배트의 도료가 규정보다 진하게 칠해진 배트 7자루를 적발했다. KBO는 “규정 위반 소지가 있는 선수 6명의 배트 7자루를 회수하고 사용금지 조처했다”며 “이 배트들은 국내 업체 3개사, 미국 업체 2개사 등 5개사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업체들에게는 KBO가 검사 결과를 전달해 시정을 요구했다.
문제는 배트 검사가 끝난 뒤에 생겼다. 배트 부적격 검사에 적발된 선수 명단이 공개돼 불필요한 오해가 불거진 것이다. 더그아웃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검사 특성 상 배트 주인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에게 노출됐고, 언론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그 명단 안에는 인기 구단에서 중심 타자로 활약하고 있는 한 선수가 포함돼 과도한 비난이 쏟아졌다.
KBO는 지난 5월 8일 전국 5개 구장에서 부적격 배트 검사를 실시했다. 연합뉴스
결국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다음날 성명까지 발표했다. “공인 배트 제조에 책임이 없는 선수들의 실명이 노출돼 마치 부정 배트를 사용한 것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KBO도 억울한 입장이다. KBO 관계자는 “KBO가 배트 검사 시기와 적발된 배트 소지자들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다. 더그아웃에서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검사를 진행하다 현장에서 본의 아니게 선수들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다만 앞으로 조금 더 신중한 배트 검사 방법을 찾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배트 검사에서 적발된 선수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KBO 도료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부적격 배트’는 선수가 임의로 배트를 개조하거나 가공하는 ‘부정 배트’와 의미 자체가 다르다. 부정 배트는 타구 반발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코르크와 같은 이물질을 끼우거나 표면을 평평하게 하거나 못을 박거나 속을 비우거나 홈을 파거나 파라핀 왁스를 칠한 배트 등이 해당된다. 반면 이번에 적발된 부적격 배트 7자루는 선수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배트 제조업체의 실수다. 심지어 경기 때 아직 사용하지도 않은 새 배트들이었다.
애초에 KBO의 배트 검사 자체가 부적격 배트를 사용하는 선수를 적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공인 배트 업체가 선수들에게 규정에 맞는 방망이를 제조해 공급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시즌 중 수시로 진행되는 공인구 반발계수 검사 역시 공인구를 받아 쳐 홈런을 친 선수가 아니라 그 공을 제작한 공인구 제조업체를 향한다. 부적격 배트를 소지하고 있던 선수들도 당연히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 야구 방망이는 어떻게 세밀하게 제작되나
어쨌든 이번 ‘부적격 배트’ 관련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선수들의 야구 배트가 얼마나 섬세한 기준에 따라 제작되는지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야구는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행위에서 출발했고, 배트는 야구의 가장 기본적인 장비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세상 모든 방망이가 다 다르다. 타자들은 최고의 타격을 하기 위해 최적의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고 싶어 한다.
프로 선수들은 배트가 1g만 무거워지거나 손잡이가 1㎜만 얇아져도 금세 그 차이를 감지한다. 배트 제조업체들이 방망이를 깎을 때 1000여 가지의 다른 매뉴얼을 사용할 정도다. 배트를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에게 모두 장인정신이 필요한 이유다. 프로용 배트는 대부분 맞춤 생산하는데, 선수의 체격이나 스윙 스타일에 따라 무게와 길이, 구조가 달라진다. 야구 규칙에는 ‘경기 때 사용하는 배트는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이 10㎝ 이하, 길이 42인치 이하여야 하고 하나의 목재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나와 있다.
무게는 선수 개인 재량에 따라 다르다. 배트의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비거리가 늘어나지만, 반대로 배트가 무거우면 그만큼 스윙을 빠르게 하기 어렵다. 많은 장타자들은 늘 둘 가운데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한국 선수들은 길이 33~34인치에 무게 850~910g 정도의 배트를 가장 많이 쓴다. 이것보다 길면 몸 쪽 공 대처가 어려워지고, 더 무거우면 스윙 스피드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물푸레나무를 많이 썼지만, 2000년대 이후엔 단풍나무 배트도 많아졌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원목을 수입한 뒤 제재소에서 절단하고, 고주파를 사용해 건조한다. 그 다음에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공작기계를 사용해 원목을 결대로 자른다. 나무 중심으로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통나무 중심에 가까운 부위는 장거리 타자용, 테두리 부분에 가까운 부위는 단거리 타자용에 각각 많이 쓰인다. 이 과정을 거친 나무는 냉동 창고에서 한 달간 저온 숙성된다. 한 달 후 상온에 꺼내 놓으면 나무가 녹으면서 그 안에 배어있던 수분이 빠져 나온다. 그 다음엔 고주파 기계에서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가면서 120시간 정도 건조시킨다. 수분함유량에 따라 배트 탄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무가 완벽하게 준비되면 초벌 건목을 시작한다. 배트의 헤드와 손잡이 부분을 표시해 대강의 모양이 나오도록 깎는다. 배트에서 가장 무거운 헤드는 나무의 결이 촘촘한 부분으로 깎아내야 한다. 손잡이 부분의 결이 촘촘하면 배트가 쉽게 부러져서다. 건목 기계를 돌리면서 칼을 나무에 들이대고 모양을 잡아 나간다. 초벌 건목을 마친 배트의 무게는 약 2000g 정도 된다.
2차 건목은 이 배트에서 절반 이상을 더 깎아내고, 3차 건목까지 끝낸 뒤에야 배트 무게가 1000g 이하로 줄어든다. 비로소 배트의 모양이 갖춰지기 시작한다. 손잡이 끝부분 뭉툭한 부분과 배트에서 가장 얇은 손잡이 부분은 선수들이 무척 예민하게 살피는 부분이다. 그래서 더 신경 써서 다듬는다.
그 다음은 사포로 방망이를 문지른다. 아주 거친 사포부터 시작해 부드러운 사포로 마무리를 한다. 전자저울에 무게를 달아서 배트의 무게를 수시로 체크한다. 이때 원래 배트 무게보다 20g이 적게 나가는 게 중요하다. 마무리 작업으로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도료 무게 때문에 20g 정도가 늘어나서다.
이렇게 배트가 완성되면 도료로 색을 입히고 이름과 등번호를 새긴다. 색상은 선수들이 주문한 색으로 칠한다. 전통적으로 해태나 KIA 선수들은 유니폼과 비슷한 붉은 계열의 배트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검정색 배트를 선호하는 선수도 있고, 그냥 원목 그대로의 느낌을 좋아하는 선수도 있다. 취향은 천차만별이다.
타격 훈련을 하던 중 팀 동료의 배트를 들어보고 있는 박병호. 연합뉴스
프로 선수들이 쓰는 배트는 비싸다. 보통 한 자루 가격이 15만 원에서 25만 원까지 형성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 배트는 30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숙련된 전문 인력이 길고 세밀한 공정을 거쳐 제작하기 때문에 싼 값에 공급할 수가 없다. 1990년대까지는 선수들이 대부분 자비로 배트를 사야 했다. 새로 산 배트 하나가 경기 중에 부러지기라도 하면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부터는 각 구단이 배트 교환 쿠폰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1군 선수들에게 15만 원, 2군 선수들에게 10만 원짜리 쿠폰을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금액을 초과하는 비용은 선수가 직접 내야 한다. 상대적으로 연봉이 적은 2군 선수들은 당연히 좋은 배트를 쓰기 어렵다.
결국은 야구를 잘하는 게 답이다. 야구를 잘하면 배트를 사는 데 돈을 안 써도 된다. 1군의 주전급 선수들에게는 배트 업체들이 먼저 후원을 제안한다. 1년에 수십에서 수백 자루씩 제공한다. 성적이 좋고 연봉이 높을수록 장비에 쓰는 돈은 점점 줄어든다. ‘부익부 빈익빈’은 냉정한 프로 세계의 현실이다. 통 큰 선배들은 후원 업체에서 제공받은 배트를 후배들에게 한두 자루씩 나눠주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배트를 쓰는 후배들에게는 스타 선배의 방망이 선물이 반갑기만 하다. 누군가 깜짝 홈런을 쳤을 때 “아무개 선배의 배트 덕분”이라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유다. 친한 선수들끼리는 수시로 서로의 배트를 휘둘러보면서 한두 자루씩 맞바꾸기도 한다. 어떤 선수는 선배가 준 배트를 사용해본 뒤 뒤늦게 “마침내 내 느낌을 찾았다”며 자신이 쓰는 배트의 사양을 교체하기도 했다.
선수들의 타격 폼이 유행을 타듯, 배트에도 ‘시류’가 있다. 그해 한창 잘 치는 타자의 배트는 10개 구단 타자들의 관심거리다. 이승엽과 심정수가 나란히 50홈런을 넘긴 2003년에는 수많은 선수들이 배트 제작업체에 ‘이승엽 배트’와 ‘심정수 배트’를 주문했다. 이용규(한화)가 국가대표 테이블세터로 맹활약하던 2008년과 2009년에는 전 구단의 체격 작은 타자들 사이에 ‘이용규 배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14년에는 한 시즌 최초 200안타를 친 서건창(넥센)의 배트가 유행했다. 길이 33.5인치, 무게 860~870g로 딱 평균적인 사양이었지만, 헤드의 두께가 같은 조건의 다른 배트들에 비해 얇은 게 특징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거포형 타자들 사이에서 최대한 무거운 배트를 쓰는 게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다. 이대호(롯데) 김태균(한화) 같은 타자들이 1㎏에 육박하는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고, 훈련 때는 1㎏짜리 방망이를 사용한 적도 있다. 이승엽 역시 홈런타자 치고 몸무게가 적었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960g에 달하는 배트를 들고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배트 무게보다 스윙 스피드에 더 중점을 두는 타자들이 많다. 박병호는 50홈런을 돌파할 때 상대적으로 가벼운 890g짜리 배트를 썼다. 지난해까지 2년 연속 홈런왕에 오른 최정도 900g짜리 방망이를 사용하고 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배트 무게를 줄이는 게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선수들의 배트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술자가 같은 조건으로 만든 배트도 한 자루, 한 자루 모두 다 다르다. 오직 그 배트를 쓸 선수만이 수많은 배트 가운데 내 손과 내 스윙에 가장 잘 맞는 ‘나의 배트’를 찾아낼 수 있다. ‘프로’라는 전쟁터에서 야구 방망이는 선수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일본이 1980년까지 압축배트 허용한 이유? 홈런왕 오 사다하루 때문 배트 공급업체가 잘못 제조한 ‘부적격 배트’와 달리, 압축 배트는 확실한 ‘부정 배트’의 일종이다. 배트를 만드는 나무에 약품 가공을 하고 순간 압축 처리를 해 반발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장비다. 당연히 일반적인 공정 과정을 거친 배트보다 타구를 훨씬 더 멀리 보낼 수 있다. 한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일본 프로야구에선 1980년까지 압축배트 사용을 허용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압축배트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었지만, 수년간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 요미우리의 역사적 홈런왕 오 사다하루 때문이다. 현역 시절의 오 사다하루. 유튜브 영상 캡처. 오 사다하루는 압축배트를 즐겨 사용했던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1977년 당시 행크 애런이 보유하고 있던 통산 최다 홈런 세계 기록을 경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야구계 전체가 오 사다하루의 홈런 행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시절이다. 커미셔너가 갑자기 압축배트 사용을 금지하기엔 부담이 따랐다. 결국 오 사다하루가 통산 868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고 1980년 은퇴하자 일본야구기구가 칼을 빼들었다. 1981년부터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 모두 압축배트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오 사다하루의 압축배트 사용을 이유로 이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일본은 과거 메이저리그의 스핏볼 시대 기록과 마찬가지로 리그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된 기록은 모두 인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쨌든 정작 종전 기록 보유자였던 행크 애런은 오 사다하루에게 축하와 박수를 보냈다는 후문이다. 1982년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에선 압축 배트 사용이 처음부터 금지됐다. 하지만 논란이나 의혹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5월에는 상징적인 사건도 터졌다. 삼성이 LG와 대구 3연전에서 홈런 17개를 몰아치면서 49점을 뽑아내자 분개한 LG가 “삼성 타자들이 압축 배트를 사용한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KBO가 직접 나서 삼성 타자들의 배트를 절단하고 검사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파장은 일파만파 번졌다. 하지만 결론은 ‘문제없음’. 삼성 타자들의 배트에선 약품 사용이나 압축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배트의 재질도 북미산 물푸레나무의 일종인 ‘화이트 애쉬’였다. 삼성이 “미국 베로비치 전지훈련 도중 미즈노 미국지사를 통해 배트 588자루를 구입했고, 그 배트를 LG와 3연전에서 사용했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 KBO가 선수들의 부정 배트 검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