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구단이 행하는 공공연한 비밀…LG는 아예 사인 훔친 내용을 ‘벽보’로 붙여 비난 화살
4월 18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IA-LG전. 한 언론사 사진기자가 더그아웃과 라커룸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나치다 벽에 부착된 A4 용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종이 안에는 ‘KIA 구종별 사인’이라는 제목 아래 ‘몸쪽(검지 왼쪽 터치) 바깥쪽(검지 오른쪽 터치) 커브(검지, 중지) 슬라이더(검지, 중지, 새끼) 체인지업·포크볼(검지, 중지, 약지, 새끼)’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른손 타자 기준으로 KIA 배터리의 구종과 코스에 따른 손동작이 상세하게 명시된 것이다.
# LG의 ‘벽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논란이 일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 사진이 즉각 언론에 보도됐고, LG는 당황했다. 야구팬들은 공분했다. LG는 긴급회의 끝에 잘못을 인정했다. “선수단에 확인한 결과, 전력분석에서 정보 전달을 하는 내용 속에 주자의 도루 시 도움이 되기 위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양상문 단장과 류중일 감독은 알지 못한 일이었다”고 해명했다. 다음 날엔 구단이 신문범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고, 류중일 감독이 대표로 취재진을 통해 사과했다.
KBO 상벌위원회도 열렸다. KBO는 리그 규정 제26조 2항에 명기된 ‘벤치 외 외부 수신호 전달 금지 및 경기 중 외부로부터 페이퍼 등 기타 정보 전달 금지’ 사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LG 구단에 벌금 2000만 원을 부과했다. 양상문 LG 단장에게도 책임을 물어 엄중 경고했다.
감독과 코치 역시 징계를 받았다. 류중일 LG 감독에게는 “해당 사안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고는 해도 경기장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관리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제재금 1000만 원을 부과했다. 1루와 3루 주루 코치를 맡고 있는 한혁수 코치와 유지현 코치에게도 각각 제재금 100만 원 징계를 내렸다.
상벌위원회는 “LG가 사과문과 소명 자료를 통해 ‘해당 사안이 타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으며 전력 분석팀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설명했지만, 구단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행위로 리그 전체의 품위와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했다”며 “인지 여부를 떠나 구단뿐 아니라 현장 관리자의 책임을 물어 단장, 감독, 코치에게도 이같이 제재했다”고 설명했다.
# 사인 훔치기, LG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 팀의 사인을 ‘훔치는’ 것은 분명히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 이기기 위한 편법 행위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상대 팀의 사인을 훔치지 않고 ‘정직하게 야구만 하는’ 팀은 프로야구 출범 이래 단 한 구단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베테랑 A 감독은 “정도나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팀이나 조금씩 사인은 훔치고 있다. 다른 팀에 사인을 들키지 않게 사인 체계를 자주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출신인 트레이 힐만 SK 감독의 생각도 같다. “사인 훔치기는 미국, 일본 등 어디서나 논란이 있는 일”이라며 “경기 중 모두가 집중하고 있을 때 1루 혹은 3루에 있는 코치들이 사인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경기의 일부일 수 있다“고 했다. ‘훔치기’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과 달리, 모든 팀이 승리를 위해 행하고 있는 수단 중 하나라는 의미다.
경기 도중 수많은 사인이 오가는 야구에서 상대 팀의 사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하면 승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타자가 포수의 볼 배합 사인을 미리 알고 타격하면 절반은 이기고 시작하는 셈이다. 도루를 하고 싶은 주자 역시 투수가 직구를 던질지, 변화구를 던질지만 미리 알아도 타이밍을 잡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 때문에 많은 팀들이 경기 중 시시각각 상대 팀 사인을 유심히 살펴보고 특징을 읽어내려고 애쓴다. TV 중계 화면 속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대화 내용 대부분이 상대 투수의 구종이나 컨디션, 혹은 상대 벤치나 포수의 사인과 관련돼 있다.
# 사인을 지키기 위한 포수들의 전쟁
많은 팀이 포수 트레이드를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포수만큼 팀의 사인 체계를 잘 아는 포지션이 없기 때문이다. 선수 한 명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만 해도 팀의 사인 패턴에 변화를 주는데, 포수가 라이벌 팀으로 옮기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1군부터 2군까지 사인 체계를 전면적으로 다 바꾸는 게 필수다.
물론 요즘처럼 전 경기가 상세하게 TV로 중계되는 시대에는 포수 사인을 알아채기가 더 쉽다. 더그아웃에선 오히려 각도 상 포수들의 사인을 자세히 보기 어렵다. 반면 TV 화면에선 포수의 수신호가 정면으로 노출된다. 다시보기 영상을 통해 조금만 자세히 살펴봐도 선수들 머릿속에는 공통된 수신호들이 각인된다.
그만큼 사인을 들키지 않으려는 포수들의 노력도 치열하다. 주자가 2루에 있을 때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에야 포구 자세를 잡고, 사인이 읽혔다는 느낌이 들 때는 곧바로 미리 준비해 놓은 다른 사인 체계로 교체한다. ‘현미경 분석’으로 유명한 일본 프로야구에선 더 심하게 단속한다. 주니치에서 뛰었던 선동열 국가대표 감독은 “일본에선 선발투수가 3회마다 사인체계를 바꾼다. 심할 땐 이닝마다 사인을 교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너무 사인을 자주 바꾸면 오히려 선수들에게 혼란이 생길 수 있다. 투수와 포수의 순간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
노련한 포수는 아예 노출된 사인을 역이용해 타자와 주자를 골탕 먹이기도 한다. 바깥쪽으로 빠져 앉는 척하면서 몸쪽 공을 요구하거나, 일부러 ‘들킨’ 사인 체계를 계속 사용하다가 중요한 순간 다른 사인을 사용해 반격하는 식이다.
# 2루 주자의 사인 훔치기와 빈볼
사인 훔치기 논란이 가장 문제가 되는 순간은 2루 주자가 타석에 있는 타자에게 투수의 구종과 코스를 알려줄 때다. 한 투수가 던지는 구종은 대부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몸쪽인지 바깥쪽인지 코스만 알아도 타자가 승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인 2루에 있다는 것은 안타 하나면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중요한 상황이라는 의미도 된다. 사인을 알려줘서라도 점수를 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투수가 막 공을 던지려는 순간 2루 주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특정한 동작을 취한다면 곧바로 의심을 받는다. 모자 앞부분을 만지거나, 허리에 손을 얹거나, 왼쪽 혹은 오른쪽 다리를 특정 패턴에 따라 먼저 뻗거나 하는 모습이 모두 상대팀의 의혹을 받는다. 베테랑 코치 B는 “벤치에 앉아있는 코치나 선수들도 바보가 아니다. 주자 한 명이 나가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며 “그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2루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삼가는 주자들도 있다. 야구인들의 눈은 무척 정교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런 움직임 탓에 투수와 2루 주자가 갑자기 설전을 벌이거나, 아예 빈볼 시비로 이어진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2000년 현대와 두산의 한국시리즈였다.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현대가 먼저 3연승을 거둔 뒤였다. 현대 박재홍이 2루에서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제기됐다. 박재홍은 “절대 아니다”라고 펄쩍 뛰었지만, 두산 선수들은 3차전이 끝난 뒤 선수단 미팅을 통해 전의를 불태웠다. 한 투수는 “박재홍이 타석에 나오면 머리를 맞혀버리겠다”고 흥분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공교롭게도 3차전까지 펄펄 날던 박재홍이 이 논란 이후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그 사이 두산은 3패 뒤 다시 3승을 내리 따내며 3승 3패로 균형을 맞췄다. 현대는 결국 7차전을 잡고 우승했지만, 당시 현대 사령탑이던 김재박 감독은 훗날 “정말 사인을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상대의 사인을 눈치껏 잘 알아내는 것도 야구의 기술”이라고 했다.
2006년 7월 2일 대전 현대-한화전에서는 한화 투수 안영명이 현대 김동수에게 빈볼을 던졌다가 난투극으로 번졌는데, 당시 현대 2루 주자가 사인을 훔치는 모습을 포착한 한화 벤치가 안영명에게 빈볼을 지시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두산 오재원은 2012년과 2016년에 두 차례 사인 훔치기 논란에 휘말려 빈볼과 벤치 클리어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오재원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고, 상대 팀도 한 차례 ‘보복’ 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 LG, ‘들켜서’ 문제였다
사인 훔치기는 이렇게 전 구단의 공공연한 비밀에 가깝다. LG의 이번 논란이 야구팬들 사이에선 ‘도덕성’ 문제로 질타를 받았지만,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선 오히려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 받았다. 남몰래 공유했어야 할 사인을 공개적인 장소에 붙여 놓은 부주의에 혀를 찬 것이다. 지금은 지휘봉을 내려놓은 C 감독은 “사인 훔치기는 모든 팀이 다 한다. 다만 기술적으로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후환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훔치는 순간 문제가 된다”고 했다.
다른 구단 D 관계자는 “상대 배터리의 사인 정보는 우리 팀 선수들에게도 제공되고 있다”면서도 “선수들이 이런 정보를 머릿속에 인지하고 경기에 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놓고 붙여놓았기에 지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 다른 구단 E 관계자 역시 “보통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게 당연하다. 매너 없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LG만 사인을 훔친 것은 아니지만, 훔친 사인을 벽에 붙여 놓은 팀은 LG가 유일했기에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얘기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메이저리그 사인 훔치기는? 쌍안경 들고 보다 카메라에 딱 걸렸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사인 훔치기 의혹으로 인한 논란은 종종 벌어진다. KBO 리그에는 ‘벤치 내부, 베이스코치 및 주자가 타자에게 상대 투수의 구종 등을 전달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메이저리그는 이마저도 없다. 선수들끼리 알음알음 사인을 읽어내고 서로 몰래 알려줘도 제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사인을 잘 훔치는 것’이 결국 그 팀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조 매든 시카고 컵스 감독은 “나는 LA 에인절스에서 코치로 일하던 시절, 상대팀 사인을 읽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며 “상대 팀 사인을 읽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선수들은 모든 사인을 주고받을 때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조 매든 시카고 컵스 감독은 ”과거 코치 시절 나는 상대 팀 사인을 읽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토니 라루사와 과거 화이트삭스 벤치코치로 활약했던 조 노섹도 상대팀 사인을 잘 꿰뚫어 보는 재주로 유명했다. 노섹 코치는 아예 ‘하늘에 떠 있는 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섹이 훔친 사인 덕분에 이긴 경기가 한 시즌에 4~5승은 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금 토론토에서 뛰고 있는 러셀 마틴은 양키스 시절 바톨로 콜론과 배터리를 이뤘다가 1회에만 8점을 내준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상대팀이던) 토론토 주자들이 노골적으로 사인을 전달했다. 어떤 쪽으로 머리를 흔들면 직구, 그 반대쪽이면 슬라이더라는 식이었다”고 불평하면서도 “그들이 사인을 읽고 있다는 걸 더 일찍 간파하지 못한 내 문제”라고 했다. 현역 최고 투수로 꼽히는 LA 다저스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가 유독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한 원인으로 사인 훔치기가 꼽히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는 2013년 챔피언십시리즈와 2014년 디비전시리즈에서 연속으로 커쇼를 무너뜨렸는데, 이때 3루 코치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가 포수의 사인을 타자에게 알려준다는 의혹이 나왔다. 세인트루이스는 “우리가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절대 아니다”라고 부인했고, 다저스 감독도 공개적인 언급은 꺼렸다. 사인을 들킨 것 자체가 프로로서 실력 부족이라는 눈길을 받을 수 있어서다. 2010년에는 쿠어스필드에서 열린 콜로라도와 필라델피아의 경기 도중 필라델피아 불펜 코치가 원정팀 불펜에서 쌍안경을 들고 포수 쪽을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콜로라도 지역방송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됐다. 바로 직후 더그아웃에 있던 다른 코치가 불펜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포착됐다. 콜로라도 감독이 노발대발했고, 비난도 쏟아졌다. 필라델피아 감독은 “사인은 훔칠 수도 있다고 보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고 애매모호하게 부인하면서 “불펜 코치는 상대 포수가 아니라 우리 팀 포수의 스탠스와 미트질을 관찰했다”는 변명을 했다. 하지만 콜로라도 지역 방송사가 불펜 코치의 사인 훔치기를 포착한 시점은 명백히 필라델피아의 공격 상황이었다. 사무국에서는 단순 경고로 이 해프닝을 마무리했다. 다만 전자기기를 사용하거나 그라운드 밖에 있는 구단 직원을 통해 사인을 훔칠 경우엔 엄격한 징계가 내려진다. 유니폼을 입은 감독, 코치, 선수들이 ‘육안으로’ 상대 사인을 파악하는 상황만 ‘야구의 일부’로 허용된다는 얘기다. 지난해 9월 전통의 라이벌인 보스턴과 뉴욕 양키스 경기에서 발생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은 “보스턴 구단이 스마트기기인 애플 워치를 사용해 더그아웃의 선수들에게 사인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보스턴 전력분석원이 경기 영상을 살펴보면서 상대 포수의 볼 배합 사인을 읽어낸 뒤 더그아웃에 있는 트레이너와 일부 코치들에게 스마트 워치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보스턴도 그 사실을 시인했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보스턴은 ‘사인 훔치기’ 자체가 아니라 더그아웃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보스턴 역시 “양키스가 구단 자체 방송국의 리플레이 카메라를 통해 상대 팀의 사인을 계속 훔쳐왔다”고 반격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양키스가 불펜 전화를 사인 전달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적발돼 다시 벌금을 물었다. 이 사례 역시 전자기기나 통신장비를 악용했다고 판단해서다. 메이저리그가 올 시즌부터 더그아웃에서 불펜 전화로 오가는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하기로 결정한 배경이기도 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