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인가. 김 총장은 천정배 법무장관의 수사지휘를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1년 반이나 남은 임기를 포기했다. 그가 지키려하는 원칙은 이임사에 잘 요약돼 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찰조직을 위한 게 아니라 그렇게 돼야만 국민이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관이 피의자 구속 여부에 대해 구체적인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검찰의 중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매우 충격적인 일로서 그간 검찰이 쌓아온 정치적 중립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강정구 교수 건에 대해서는 김종빈 총장 말대로 정치로부터의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총장의 용퇴는 국민들에게 독립을 열망하는 검찰의 의지와 독립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또 자신의 희생을 통해 스스로가 몸담아온 조직의 미래를 탄탄하게 다져주는 소득을 거두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최선의 결말은 아니다. 그러나 시계를 20년만 뒤로 돌리면 오늘의 현실은 경이적인 발전으로 탈바꿈한다. 5공화국에서 검찰은 누구였는가. 대통령의 수족과 같은 존재로서 정권의 안위를 책임지는 검찰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무엇인가.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역시 대통령이 임명한 정치인 법무장관과 공개적으로 명분투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무섭던 검찰이 이번에는 약자로 국민의 동정과 지지를 호소하는 처지로 바뀐 점이다.
민주세력의 상징인 김대중 정부 시대에도 국가정보원의 조직적 도청이 광범위하게 지속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제대로 된 민주사회의 형성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가능해진다. 이번 수사권 지휘 파동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사회 민주화 진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권력기관 간 갈등의 최종심판자로 국민의 존재가 중요하게 등장한 점이다. 장관은 제도가 부여한 권한을 행사했고 총장은 그 권위에 형식적으로는 순응했다. 두 사람에 대한 행정적 지휘권은 대통령이 쥐고 있다. 대통령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이 이렇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라는데 있다. 장관이나 총장,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최종 심판자인 여론, 국민의 눈치를 안볼 수 없게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여론법정에서는 장관과 대통령의 처지가 어려워 보인다.
이번 사안을 긍정적으로 보는 둘째 이유는 비교적 열린 공론의 장이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극좌에서부터 극우까지 온갖 주장들이 제기됐지만 갈등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진행된 점은 한국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좋은 징조다. 아직 제대로 된 민주문화를 정착시키려면 갈 길이 멀다. 집권당과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적 말싸움에서는 좌절감조차 느낀다. 그러나 보수진영에서도 강 정구 교수의 불구속타당성을 주장하는 글이 나오고, 정부에서는 강 교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고백도 나왔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우리사회의 공론 마당과 관용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