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롯데 이어 한화도…“이사회 중심 투명경영·책임경영 강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했는지, 정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삼성 전·현직 간부는 삼성 컨트롤타워로 불린 미전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직격탄을 맞은 미전실은 ‘정경유착의 온상’으로 몰리며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만든 회장 비서실이 모태인 미전실은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60년 가까이 명맥을 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삼성을 둘러싼 경영 환경 또한 변했지만 미전실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미전실을 바라보는 재계 안팎의 시선은 “오너를 위한 조직”,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만든 회장 비서실이 모태인 미래전략실(현재 해체)은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60년 가까이 명맥을 이었다. 사진 서울 삼성전자 서초 사옥. 고성준 기자
미전실과 함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주·조연으로 등장한 롯데그룹 정책본부도 지난해 해체됐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정책본부가 주도한 면세점 로비 의혹과 관련해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친위조직’ 격인 정책본부는 그룹 내에서 사실상 무한한 권한을 행사했다. 제2롯데월드 타워 건립 등 굵직한 경영 현안은 모두 정책본부가 입안하고 실행했다. 인사, 전략, 법무, 대외협력 등 그룹 경영과 직결된 문제는 물론 오너 일가의 대소사까지 챙겼다. 롯데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정책본부 내에 비서1팀과 2팀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회장을 보좌했다”며 “신동빈 회장이 이른바 ‘형제의 난’ 때 한국어 과외를 받는 데도 정책본부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미전실과 정책본부는 그룹 내부적으로 오늘날의 삼성과 롯데를 만든 ‘공신’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들 조직은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총수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총수를 정점으로 한 그룹 계열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오너의 지시를 이행하고 품질 혁신 등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다. 또 총수의 판단으로 유망 사업을 육성할 때면 인력과 자본을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기업은 외형상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나친 오너십은 회사 리스크로 돌아왔다. 총수와 총수를 둘러싼 가신집단은 이사회를 대신해 그룹 경영권을 독점했다. 의사결정은 불투명해졌고 그에 따른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5대 그룹 한 관계자는 “삼성을 예로 들면 미전실은 각 계열사 이사회를 뛰어넘는 권한을 가졌는데 그 권한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며 “미전실 전체 직원이 몇 명인지, 보수는 얼마인지, 누가 회의에 참석했는지, 어떤 논의를 했는지까지 비공개다보니 경영 투명성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전실과 정책본부는 각각 그룹 후계자의 경영 승계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31일 경영기획실을 없앤 한화그룹도 마찬가지다. 한화가 최근 단행한 지배구조 개선은 결과적으로 그룹 후계구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시장은 분석한다. 한화는 각 계열사로부터 인력을 받아 컨트롤타워인 경영기획실을 운영했다. 지주회사인 ㈜한화가 있지만 경영기획실이 그룹 최고 의사결정을 책임져왔다. 경영기획실 좌장격인 금춘수 한화 부회장은 최근까지 ㈜한화가 아닌 한화케미칼에 적을 뒀다. 경영기획실에 속한 직원은 계열사 업무와 무관한 일을 하면서도 인사상 혜택을 받았다. 그간 컨트롤타워가 ‘유령조직’이라고 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횡령, 배임, 탈세’ 등 경영비리 혐의 관련 1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재계에선 이들 조직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경영 승계 문제를 꼽는다. 재계 한 관계자는 “소위 컨트롤타워가 오너 조직이다보니 오너 공백 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일부 기업에선 가신집단의 ‘전횡’이 논란이 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롯데의 경우 서로 다른 오너를 보좌한 비서1팀과 2팀은 신격호 회장의 와병 등을 계기로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도 미전실과 이재용 부회장 사이에 일부 갈등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이 없지 않다. 현대차의 경우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이 지난해까지 실질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현대차는 공식적으로 컨트롤타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 각 대기업 컨트롤타워가 정경유착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재계 한 임원은 “이번 정부 들어 재벌개혁 여론이 일면서 컨트롤타워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모든 기업의 컨트롤타워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SK그룹의 ‘미니 컨트롤타워’인 그룹 대외협력 조직은 문재인 정부와 관계 개선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SK는 공식적으로 계열사 전문경영인 협의체인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미전실과 달리 오너 일가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톱다운 형태의 의사결정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SK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각 계열사 간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하되 따로 의견 조율이 필요한 부분을 협의하는 조직”이라며 “그룹 내 별도 컨트롤타워는 없다”고 말했다.
SK는 다른 대기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오너 조직이 비대하지 않고, 그 영향력도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SK는 오너가 젊은 편인 데다 지주사 체제로 일찍 전환해 지배구조 이슈에서 자유로운 편”이라며 “경영 승계와 같은 현안도 없기 때문에 조직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의 모습. 연합뉴스.
SK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LG 역시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LG 측은 “컨트롤타워라기보다 ㈜LG가 각 계열사 최대주주로서 경영권과 임원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해달라”며 “지주사 본연의 역할인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 인재 육성, 브랜드 관리에 집중해 각 계열사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LG가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LG와 뿌리가 같은 GS도 별도 컨트롤타워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롯데는 롯데지주를 만들고 정책본부의 권한과 기능을 지주사에 편입했다. 법적 논란이 있던 총수 친위조직이 합법적인 컨트롤타워로 거듭난 것이다. 롯데 관계자는 “현재 롯데지주가 자회사 지원과 브랜드 관리를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롯데의 컨트롤타워 정비 작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 지주사 체제에 편입될 수 없는 금융 계열사 때문이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 계열사를 지배하려면 따로 금융지주사를 세워야 하는데 이 경우 컨트롤타워가 이원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롯데와 마찬가지로 금융 계열사를 거느린 삼성과 한화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하다. 즉 컨트롤타워와 기업 지배구조는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인 셈이다. 때문에 아직 지배구조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삼성, 현대차, 롯데, 한화 등에선 컨트롤타워의 존재 자체만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현재 지배구조나 오너십의 문제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선제적인 컨트롤타워 해체가 이뤄지고 있다”며 “삼성 미전실 사례에서 보듯 컨트롤타워는 지금은 없애도 언젠가 생겨나게 돼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려면 조직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컨트롤타워를 마냥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운영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하고, 잘못이 있다면 정부가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너도나도 구조본 벤치마킹” 삼성 컨트롤타워 보면 재계가 보인다? 삼성의 미래전략실(미전실)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만든 삼성물산 비서실을 모태로 한다. 이병철 회장은 그룹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업무를 처리할 조직으로 총수 직속 비서실을 만들었다. 1959년 설립된 비서실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 일선에 등장한 1980년대 후반부터 삼성 핵심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삼성 비서실은 삼성 성공신화의 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는 비서실의 권한을 오히려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비서실은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로 재편돼 인사, 전략, 재무, 법무 등 그룹 내 거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었다. 미전실의 실질적인 뿌리는 구조본에 있다. 그때부터 구조본은 시장 견제를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재벌 비판의 단골소재였다. 구조본은 매년 그 역할과 규모를 확대하며 정부 조직 못지않은 정보력과 언론 영향력을 확보했다. 구조본이 지나치게 커진 결과, 2000년대 중반 ‘삼성 X파일’ 사건과 같은 정경유착 스캔들이 발생했다. 사회적 비난 여론이 커지자 2006년 이건희 회장은 구조본을 전격 해체했다. 하지만 구조본은 곧 전략기획실로 부활했고,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한 2010년을 전후로 옛 구조본과 비슷한 미전실이 탄생했다. 삼성 전·현직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전실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은 비밀주의다. 같은 미전실 직원끼리도 서로 업무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구조본이 과거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등에 연루되며 강제 해체됐던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에도 삼성의 정유라 승마 지원 등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현재 주요 재벌 기업의 컨트롤타워는 대부분 구조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 구조본을 벤치마킹해 뒤늦게 세워진 총수 직속 조직이라는 것이다. 대기업 비서실 소속 한 간부는 “재계 상위 레벨에선 삼성이 하면 따라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다”며 “미전실의 동향 자체가 모든 기업의 보고거리이자 기준이었다”고 전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