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전서 마라도나에 놀랐지만 끈질기게 승부하니 그들도 위축…그때 첫 골 터졌다”
김종부 감독이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합류하기까지엔 우여곡절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고려대 시절 현대와 대우와의 스카우트 파동으로 고려대에서 제명당한 그를 대한축구협회에서 긴급 이사회 소집 후 선수 자격을 회복시켰고, 대표팀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김종부의 천부적인 축구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대표팀이 멕시코로 향하기 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할 때 김종부는 뒤늦게 대표팀 선수로 덴버에 합류했다.
대표팀 막내였던 그는 선배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스카우트 파동으로 ‘문제아’로 낙인찍힌 터라 대표팀 생활이 편치만은 않았다. 김 감독은 “아르헨티나전은 아예 출전을 못했고 불가리아전도 후반에 지고 있을 때 ‘억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김종부 경남 FC 감독
“내가 알기론 불가리아전 전반전 마치고 한국의 한 취재 기자가 대표팀 관계자에게 나를 투입시켜보라고 권유했다고 하더라. 코칭스태프에서도 0-1로 패할 바에 김종부로 선수 교체를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후반전에 교체돼 들어간 것이다. 수중전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후반 24분 조광래 선배가 헤딩으로 올려준 볼을 가슴으로 잡아낸 뒤 오른발 터닝슛을 한 게 골로 연결됐다. 경기가 무승부로 끝났음에도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점을 올린 계기가 됐다.”
1983년 멕시코에서 청소년대표팀 선수로 뛰며 4강 신화의 기적을 만들었던 김 감독으로선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이탈리아전도 선발 출전하지 못했다. 또다시 후반에 투입된 김 감독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최순호에게 크로스 패스를 올렸고, 최순호가 논스톱으로 슈팅하면서 골로 연결되는 듯했지만 아깝게 크로스바를 비켜 나갔다. 그 골이 성공했다면 한국은 16강 진출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전에서 자책골 포함 2-3으로 패했는데 무승부로만 끝났어도 월드컵 16강 진출은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우리가 이탈리아와 경기를 펼치는 도중에 무승부만 돼도 16강에 진출한다는 걸 알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같은 시각에 다른 경기장에서 불가리아와 아르헨티나전이 열렸는데 그곳 경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보니 아쉬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김 감독은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이 신구 조화, 선후배들의 팀워크가 상당히 뛰어났다고 설명한다.
“주장이었던 박창선 선배는 고참이면서도 가장 성실한 선수였다. 경기장 안에서도 희생과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허정무 선배는 아르헨티나전에서 마라도나의 허벅지를 걷어 찰 만큼 저돌적이고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에 최순호, 변병주, 이태호가, 그리고 막내급이 조민국, 김주성, 나였다. 선배들의 경험과 후배들의 패기와 중간급 선수들의 조화로운 모습이 대표팀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과 가장 흡사했던 모습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 나선 태극전사들이었다고 한다. 베테랑 황선홍 홍명보에다 중간 역할을 하는 안정환, 김남일, 차두리, 그리고 신예 박지성과 이영표의 투지가 4강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게 김 감독의 의견이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불가리아 상대 동점골. 연합뉴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월드컵이었다. 당시 32세의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고 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창선 전 경희대 감독은 아르헨티나전에서 처음 만난 디에고 마라도나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몸통이 일반 선수와 달랐다. 허벅지 굵기가 나보다 1.5배 정도 더 굵었다. 탄력이 어마어마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왼발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공의 낙하지점을 귀신같이 잘 찾아내더라. 왜 마라도나를 세계적인 선수라고 평가하는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역사적인 월드컵 1호골은 박 전 감독의 발에서 나왔다. 후반 28분 박 전 감독이 25미터의 거리에서 환상적인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아르헨티나의 두터운 수비벽을 허문 것이다.
“당시엔 대표팀 스태프가 감독, 코치 한 명 외엔 없었다. 선수를 위해 상대팀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 두세 명 정도 이름을 기억하고 들어간 것 같다.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황소같이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는 마라도나의 모습은 공포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반전을 0-2로 지고 있는 상태에서 마친 후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많은 얘기를 전했다. 내가 전한 진심이 선수들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았다. 후반서부턴 움직임이 전반과 또 달랐기 때문이다.”
비록 후반전 들어 또 다시 한 골을 헌납했지만 박 전 감독은 자신 있었다고 말한다. “골이 나왔던 건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강팀이라고 해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면 결국 기회가 온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그때 첫 골이 터졌다.”
박창선 전 경희대 감독
우리가 속한 A조에는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등 우승 후보만 2팀이나 있었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오른 한국한테는 최악의 조 편성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대표팀은 3경기에서 4골을 터트렸다. 아르헨티나한테는 패했지만 불가리아와는 대등하게 싸웠고, 이탈리아를 상대로 2-3패를 이끌었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건 일사불란했던 팀워크 때문이었다. 감독, 코치, 선수들 모두 하나로 뭉쳤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저력을 보일 수 있었다. 한국 특유의 끈끈한 팀워크가 대표팀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박 전 감독은 러시아월드컵에서 뛰고 있는 23명의 태극전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선배의 진심이 뚝뚝 묻어난 내용이다.
“우리보다 약한 팀도 없지만 우리보다 강한 팀도 없다고 믿고 싸우길 바란다. 태극기를 보고 애국가를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량을 120% 발휘할 수 있도록 감독, 코치들이 이끌어야 한다. 어느 경기든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2002년에 이룬 월드컵 4강 신화가 러시아에서 재현되길 소원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