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용 전 의원 | ||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는 거래(?)가 사라져 버렸다. 흥정이나 절충 과정도 없이 갈 데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최대의 정치적 거래는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중간평가의 실시 여부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정호용 의원의 사법처리 면제를 중간평가 거부로 흥정을 했다.
평민당에서 중간평가를 보류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보시오 거산, 듣고 있습니까?”김영삼 총재의 난데없는 전화에 김대중 총재는 당황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난 또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중간평가를 어떻게 한다고요?” “다른 기 아니고 내가 시방 우리 김동영 원내총무에게 이상한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볼라고 전화를 드렸는데 민정당에서 중간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하는 소문이 바로 그깁니다. 후광은 혹시 그런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옆에 있던 김동영 원내총무가 김영삼 총재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민정당이 아닙니다. 평민당입니다. 총재 어른.’ 그러자 김영삼 총재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막은 채 김동영 원내총무에게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그렇다고 대놓고 평민당에서 중간평가를 안하기로 했다고 물어 볼 수 있나?’ 순간 김동영 원내 총무는 역시 정치 9단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죄송합니다. 전 또 총재께서 제 얘길 잘못 들으신 줄 알고 그만….’ 김영삼 총재의 질문에 김대중 총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만 이 후광께서 어째서 말씀이 없으신가. 이보시오. 후광 내 말 들었지요?” “예 들었습니다.” “들었으면 뭐라고 말씀을 해 주셔야지, 잠자코 계시면 어쩝니까.” “거산의 말이 잘 이해가 안가서 그럽니다. 아닌 밤의 홍두깨라더니만 민정당에서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만 이렇게 물어 보지요. 만일 민정당에서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한다면 평민당에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시 중간평가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호용 의원의 사퇴 문제와 맞물려 있었는데, 그렇다면 애당초 노태우 정권의 1년 치적을 평가하는 이른바 중간평가 문제는 어떻게 해서 제기되었는가.
87년 대통령 선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노태우 대통령 후보 선거본부격인 국책조정위원회 사무실의 전화 벨이 울렸다. A의원이 전화를 받았다“국책조정위원횝니다.” “여기 한가람기획입니다. 전병민이라고 합니다“아, 전병민씨 무슨 일입니까?” “우리 한가람기획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요! 어떤 내용입니까?”
YS는 DJ를 슬쩍 떠봤다“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하고, 만나서 말씀드리지요.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런 일이라카만 시간이 문젭니까. 만사 제쳐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오소.” “어허 몹시 다급하셨구만. 알았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빨리 오소 빨리. 알았지요.” 한가람기획의 전병민은 김영삼 정부 초대 정책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학력 문제에다가 장인이 고하 송진우 암살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임명된 지 얼마 안돼 청와대를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 아이디어를 노태우 캠프에 전달만 했을 뿐 실제로 아이디어를 창안한 사람은 따로 있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풍자문학가 백성남의 진술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생각을 했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약점은 국민들의 불신이다. 민주주의 한다고 했다가 당선되면 같은 뿌리인 전두환 대통령처럼 군사독재 하는 게 아니냐 하는 국민들의 의구심이 가장 큰 약점인데 어떻게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문득 떠오른 것이 올림픽이 끝난 뒤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중간평가였다. 딴에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평가해서 한가람기획 전병민에게 넘겨주었다.”
중간평가 아이디어는 그렇게 해서 한가람기획으로 넘겨졌다. 한가람기획은 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캠프를 지원하는 몇몇 기획팀 중에서 가장 신임을 받았던 아이디어 뱅크. 그리하여 중간평가안은 곧바로 노태우 선거대책본부인 국책조정위원회로 넘겨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국책조정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최병렬 의원의 진술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가람기획에서 올라 온 중간평가안은 당선을 위한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니라 죽을 꾀였다. 스스로 파놓은 함정이었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 올림픽이 끝난 뒤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 하는 이른바 중간평가안이 한가람기획 전병민을 통해 올라 왔는데, 이 안은 민정당 선거대책본부에서는 채택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춘구 본부장을 비롯한 대책본부 지도부가 그런 내용의 극약 처방 없이도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간평가안은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이 됐는데 문제는 한가람 기획 전병민이었다. 연희동에서는 선거 상황이 지푸라기라도 붙들어야 할 만큼 다급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평가안에 미련을 두고 전병민이 연희동 노태우 후보 집을 방문해서 이 안을 이병기 보좌역을 통해 노 후보에게 전달한 것이다.” 중간평가안을 노태우 후보에게 건의한 전병민씨의 진술이다.
“우리 한가람기획에서 올린 중간평가안이 독성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결정적인 득표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노태우 후보의 최대의 약점이 무엇인가. 국민의 불신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 한다지만 당선되고 나면 같은 뿌리인 전두환이 그랬듯이 군부 강압 통치를 펼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것이 국민들의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다수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간평가안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다시 최병렬 의원의 진술. “그가 이병기 보좌역을 만나 중간평가안을 제시하면서 그렇게 설득한 것이다. 이른바 중간평가안이 독성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득표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노태우 후보의 최대 약점인 국민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간평가안을 공약으로 내걸어 국민들의 의심을 풀어 줘야만 한다, 이렇게 설득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태우 후보의 판단이었는데….” 이병기 보좌역의 보고를 받은 노태우 후보는 중간평가안에 대해서 검토를 해보라고 지시를 한다.
▲ 지난 90년 4월29일 기원법회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 | ||
그렇게까지 안 해도 이길 수 있는데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이런 주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단 말이지요?” “결정이 잘못됐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아니 대책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했으면 결정에 따라야지. 알았으니까 나가 보소.” 일단 중간평가안은 그렇게 해서 일단 폐기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노태우 후보의 이중적 특성이 드러난다. 12월10일 여의도 유세에서 대책본부와 상의도 없이 중간평가안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것이다. 노태우 후보의 흥분한 목소리다.
“국민 여러분, 이 노태우 새로운 공약을 하나 발표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보통 사람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주신다면 내년 가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에 6·29선언에서 공약한 것을 비롯하여 이번 선거에서 공약한 것을 충실히 이행했는지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정호용이 공직에서 사퇴해야당시 유세장의 열광하는 환호가 노태우 대통령에겐 족쇄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공약은 그렇게 해서 대선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왜 이 공약이 2년 뒤 89년 3월 실시 여부를 에워싸고 6공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등장했는가. 중간평가 공약을 내걸고 나서 2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그러나 5공 청산이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평가란 노태우 정권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의 실시 여부를 놓고 대책회의가 자주 열린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김용갑 6공 초대 총무처 장관, 박세직 안기부장, 홍성철 비서실장, 최창윤 정무수석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호용씨 문제? 그기 무신 말이요? 박세직 안기부장.” 김용갑 총무처장관이 물었다. “뭐가 무슨 말이요?” “방금 그러지 않았소. 중간평가를 하는 데 제일 걸림돌이 정호용씨 문제다.” “그러니까 광주사태가 있지 않소?” “광주사태?” “그것을 해결 못하면 중간평가에 이긴다는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일 급한 게 광주 사태를 해결하는 일인데 이거를 해결하자면 정호용씨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된다 이 말이오.” 김용갑 장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 보시오. 안기부장!” “아 와 또 소리를 지르고 이럽네까.” 홍성철 비서실장의 평안도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김용갑 장관은 홍 실장에게도 언성을 높인다. “홍성철 비서실장도 같은 생각입니까.” “기러니까 이렇게 같은 자리에 모인 거이 아닙네까.” 김 장관은 잠자코 있는 최창윤 수석도 쳐다본다. 딱하다는 듯이 최 수석이 입을 열었다. “김 장관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대답만 하세요. 그러니까 세 사람이 시방 정호용씨 사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여 앉았다 이 말이지요.”
“제가 모이자고 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의 지시가 있었어요.” 중간평가와 정호용 사건은 그렇게 연계가 된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이제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많은 변수가 있고 어느 후보도 마음을 놓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국이 혼탁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 마련이다. 훌륭한 지도자란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뽑기 위해서는 훌륭한 국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