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서 유기된 30대 남성 시신 발견…피의자 3명 중 1명은 도주, 돈 노린 계획범죄 정황 드러나
#‘범죄도시2’ 현실판?
2022년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2’에서 렌터카 사업가로 위장한 강해상(손석구 분)은 베트남에 방문한 한국인 남성을 봉고차로 납치한 뒤 협조하지 않자 마체테(정글도)로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이후 강해상은 사망한 남성의 시신을 암매장하고 그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한다. 관객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던 잔인한 범행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30대 남성 A 씨는 4월 30일 태국에 입국해 5월 2일 방콕 후아이쾅 지역의 한 클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5월 3일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5월 7일 A 씨의 모친은 “모르는 남자가 아들 번호로 전화를 걸어 와 ‘당신 아들이 마약을 물에 버려 피해를 봤으니 8일 오전 8시까지 300만 바트(약 1억 1000만 원)를 보내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며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 신고했다. 대사관은 현지 경찰과 공조해 긴급 수색에 나섰다.
현지 경찰이 클럽 주변 CC(폐쇄회로)TV 영상을 분석한 결과 5월 3일 새벽 2시쯤 한국인 2명이 A 씨를 렌터카에 태워 파타야로 가서 다른 화물차로 갈아타는 모습이 확인됐다. 차량 운전자까지 총 3명은 3일 오후 파타야의 한 숙박시설 인근에서 밧줄과 검은색 드럼통 등을 구입해 4일 오후 9시쯤 맙프라찬 호수로 향했다. 이때 A 씨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를 이어가던 경찰은 5월 11일 밤 파타야 맙프라찬 호수에서 시멘트로 메워진 검은색 플라스틱 드럼통 안에 담긴 A 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A 씨의 시신은 알몸에 손가락 10개가 모두 잘리는 등 훼손 정도가 심한 상태였다. 12일 A 씨 유족은 태국에 입국해 현지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방콕 남부형사법원은 14일 납치 살해 등의 혐의로 피의자 3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경찰 수사 전부터 피해자의 실종 소식을 공유하던 것으로 알려진 교민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현지 교민이라고 밝힌 네이버 카페 이용자는 “와이프랑 어제 저녁에 현장 다녀왔다”라며 시신을 담은 드럼통을 발견한 현장에 경찰과 주민이 모여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공개했다. 이어 그는 “(드럼통에서 꺼낸) 시신이 부패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 저수지랑 호수가 많아서 이런 사건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이번 살인사건을 두고 범행의 장소가 해외이고, 돈을 요구하며 협박과 살인, 시신 유기 등을 저지른 과정이 범죄 영화를 연상케 한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 역시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실행에 옮겼다는 점은 이번 사건과 ‘범죄도시’ 영화의 유사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파타야 살인사건이 일종의 모방 범행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13일 YTN 라디오에서 ‘파타야 살인 사건’의 잔인한 범행 수법에 대해 “영화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면서 “영화 ‘신세계’에서 시신을 유기하는 방식, 영화 ‘범죄도시2’에서 베트남 ‘셋업 범죄(미리 정한 대상을 함정에 빠뜨려 금품을 요구하는 범죄 방식)’, 두 가지를 조합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2013년 개봉한 ‘신세계’에는 드럼통에 시신과 시멘트를 채워 바다에 유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범행 과정에서 어설픈 흉내내기의 허점이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그는 몸값 300만 바트(약 1억 1000만 원)를 요구한 피의자들에 대해 “(금액) 숫자가 애매하다”면서 “자신들이 들인 비용을 다 받아내려고 하는 거니까 아마추어들이구나, 범죄 경력이 낮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신원 노출 가능성이 높은 렌터카를 이용하고, CCTV에 번호판과 얼굴 등이 그대로 노출된 점을 “균형 잡히지 않은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시나리오
‘파타야 살인사건’의 피의자 3명 가운데 2명은 현재 체포됐고 1명은 추적 중이다. 12일 오후 7시 46분쯤 피의자 B 씨(24)는 전북 정읍시 본인의 거주지에서 체포됐으며 이틀 뒤인 14일 피의자 C 씨(27)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인터폴 국제 공조를 통해 붙잡혔다. 하지만 피의자 D 씨(29)는 현재 미얀마에서 도주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태국 렌터카 업체 직원은 D 씨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그가 태국어와 영어를 잘한다고 증언했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공범들과 현장에 있었지만, 살인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15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B 씨는 취재진에게 “아무것도 몰랐다”며 울먹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창원지법 김성진 부장판사는 “도주 우려 및 증거 인멸이 염려된다”며 B 씨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태국 현지 매체 방콕포스트와 공영 PBS 방송, 카오솟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한 피의자가 “A 씨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차에 태워서 파타야로 가던 중 A 씨가 의식을 되찾자 몸싸움이 벌어졌고, 목을 졸라 살해해 시신을 드럼통에 넣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A 씨를 방콕 한 유흥업소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으며, 납치된 A 씨에게 휴대전화 비밀번호 등을 요구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술 내용이 사실이라면 A 씨가 사망한 시점은 5월 3일로 추정 가능하다.
태국 법의학연구소는 1차 부검에서 A 씨의 양쪽 갈비뼈 등에서 골절 흔적을 발견했고, 호흡기 계통에 이상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현지 경찰은 “‘주먹과 무릎 등으로 상복부를 때렸다’는 피의자의 진술과도 일치한다”고 부연했다. 시신의 열 손가락이 잘린 것에 대해 태국 경찰은 신체 훼손 이유에 대해 “차 안에서 몸싸움을 하다가 숨진 피해자 손가락에 묻은 피의자 유전자(DNA)를 감추고 경찰이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사망 전에 잘렸다면 고문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금전을 노린 계획범죄 정황도 드러났다. 태국 수사팀은 A 씨가 휴대전화로 피의자들에게 돈 자랑을 한 정황과 피의자들이 납치 뒤 A 씨의 계좌 비밀번호 등을 요구한 정황을 확인했다. 또한 피의자 3명이 5월 1∼3일에는 방콕 롬끌라오 지역에, 3∼10일에는 파타야 맙프라찬 호수 인근에 집을 빌리는 등 미리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
범행동기가 금전 목적으로 좁혀지는 가운데 한국 경찰은 국내 피의자 B 씨에 대해 강도살인 혐의를 추가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강도살인의 형량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일반 살인죄보다 무겁다. 경찰 관계자는 “강도살인과 함께 약취 유인, 사체 유기 등 여러 혐의에 대해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태국 현지 언론은 피의자 3명의 얼굴과 이름 등을 공개했다. 또 이들이 현지 가게나 길거리 CCTV에 포착된 모습을 방송 보도에서 모자이크 없이 노출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이들에 대한 신상정보 공개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가운데 ‘디지털 교도소’가 피의자 3인방의 얼굴과 신상정보 등을 공개해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디지털 교도소는 범죄자 신상을 공개하는 사이트로 2020년 사적 제재 논란으로 폐쇄됐다 최근 다시 개설됐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