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뜨겁고 의로운 이름 의병(義兵), 그 후손을 만나다‘
출처=TvN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폰트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다른 방법도 있다. 신문에 글을 써 알리든지, 야학으로 가르침을 한다든지.” “한 나라의 황후가 시해 당했습니다. 나라님은 남의 나라 공관으로 도망쳐, 이 나라 저 나라에게 글로 손을 벌립니다. 그 덕에 서양 대국들이 줄지어 조선에 간섭합니다. 글은 힘이 없습니다. 저는 총포로 할 것입니다.” |
위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2화에서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과 그의 총포술 스승 장승구(최무성 분)가 나눈 대화의 일부다.
극중 애신은 조선 한성 땅에서 누구나 다 알아주는 명문가의 규수다. 그의 부모는 일제에 항거하다 친일파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의병이었다. 애신 역시 총포술을 익히며 그 부모의 길을 따른다. 그는 황후(명성황후)의 죽음을 슬퍼하며 결의를 다진다. 그리고 그 항거의 방법으로 ‘글’이 아닌 ‘총’을 택한다.
이 드라마 속 두 인물 간 대화는 극을 관통하는 ‘의병’의 정체성을 그대로 축약한 대목이다.
7월 26일 서대문 독립관에서 만난 조세현 전 의병정신선양회 부회장(호남 출신의 의병장 조경환의 조손)은 “1895년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전국에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라며 “이전에 조선 관리들의 부패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난 ‘동학군’들 역시 총부리를 왜놈에게 겨누며 의병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의병은 조 전 부회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국모를 잃은 전국 유림들의 참담함과 일제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반세기 간 계속되는 항일투쟁의 서막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초창기 의병장 상당수는 최익현, 유인석, 고경명 등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양반들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애신과 그 부모 역시 당대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 시대적 배경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글’만 읽던 양반들이 오죽했으면, 천하게 여기던 ‘총’과 ‘칼’을 들었으랴. 국모가 죽고, 나라가 병탄되고 무엇보다 종사가 위협받는 현실에 그들은 모든 것을 내놓았다.
김영조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총장은 그 당시 뜻이 있는 유림들이 의병을 세우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마침 의병 총모장 김준모의 현손이었다. 총모장은 의병 모집을 담당했던 지휘관을 말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살해된 후 전국 유림들은 의병을 조직했다
의병장으로 나선 유림들은 세계대전에서 솔선수범했던 영국 귀족 출신의 장교들과 견줄 정도로 그 시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역할을 다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을 처참했다. 한계도 뚜렷했다. 의병을 일으킨 대부분 양반들은 평생 글만 읽던 문신이자 유림이었지, 무관(武官)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평소 ‘병술’과 ‘병법’에 관심이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속된 말로 부전공 수준이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만은 대단했지만, 실제 병력은 ‘오합지졸’ 수준이었다. 그저 반복적인 유격전을 통해 스스로 병술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무기들이 형편없었다. 나중에 가서야 청나라를 통해 일부 화력이 보강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잘해봐야 사정거리 20m 수준의 구식 조총이 전략 화력이었다. 사정거리 200m에 달하는 일본군의 신식 조총부대 화력과 비교하자면 골리앗 앞 다윗 수준이었다.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은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의암 유인석 선생을 예로 들었다.
“의병의 태두였던 유인석 선생의 춘천 가정리 유적지에 가면 큰 바위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 바위 가운데는 옴팍 패였다. 유인석 선생은 당시 아녀자들에게 그곳에 소변을 보도록 명했다. 그 소변이 마르면, 거기서 화약의 원료를 취했단다. 그 정도로 의병들의 화력이라는 것이 유치하고 열악했다.”
이렇게 유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의병은 훗날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던 신돌석 등 서자, 농민, 포수 등 하층 양민 출신으로 다양화되고 1905년 을사늑약 및 1907년 관군 해산 이후엔 7만 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된다. 하지만 1909년 일본군의 토발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이후 의병은 그 수가 급감했고, 잔존 세력들은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죽어나갔다. 앞서의 조세현 전 부회장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시작된 이 땅의 항일투쟁은 1945년 광복까지 계속된다. 그 50년 동안 이땅에서 약 15만 명이 순국을 했다”라며 “1919년 3.1절을 대략 중간으로 놓고 보면, 의병투쟁 시기인 전반기에 66.3%에 달하는 10만 여명이 순국했다. 항일투쟁사 전체를 놓고 보면, 그렇게나 많은 의병이 죽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항일투쟁사 초반의 시작이자 주역인 ‘의병’의 희생은 막대했지만,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한 것이 사실이다. 항일투쟁사의 중심은 살아남은 ‘애국지사’들 위주의 기술이었고, 조명이었다. 목숨을 잃은 의병은 사실 너무나 먼 얘기였다.
서대문 독립관에서 만난 의병장 조경환의 조손 조세현 선생.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조세현 전 부회장의 조부 조경환 의병장은 그 적절한 예다. 조경환 의병장은 1908년 12월 19일,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전사했다. 당시 조 의병장은 척탄 두 발을 가슴에 맞아 쓰러졌는데, 품 속 간직해있던 의진 명단(병부)을 죽기 전 온 힘을 다해 불살랐다.
이와 관련해 조 전 부회장은 “지금이야 의병 투쟁의 증거가 되는 그 명단이 남아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것이 적에게 넘어갈 경우 살생부나 마찬가지였다”라며 “이처럼 병부는 양면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후대들의 삶은 비참했다. 조 전 부회장은 “조부께서 순국하시고, 양반가였던 집안이 어려워졌다”라며 “소작조차 쉽지 않아 선친들은 목수가 됐고, 나 역시 어린 시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의병 후손들 대부분 나처럼 어려운 삶을 산다”고 지적했다.
얼마 전 괴한의 급습으로 숨진 카자흐의 고려인 피겨스타 데니스 텐의 외증조부는 의병장 민긍호 선생이었다. 민 선생 가문 역시 몰락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데니스 텐은 그 슬픈 역사의 유산이었던 셈이다.
조 전 부회장은 이어 “문재인 정부 들어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을 강조하고, 내년엔 100주년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항일투쟁의 시작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 이전에 순국한 의병을 비롯한 선열들에 대해선 소홀한 측면이 있다. 이 점은 지금도 좀 아쉽다. 내년은 순국선열의 날 80주년이기도 한데 말이다. 최근에서야 현 정부가 ‘의병’과 ‘여성독립운동’의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강조하더라.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1907년 경기도 양평군의 한 의병장이 영국 데일리메일 소속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하던 도중 남긴 말이다. 이 말 한마디에 당시 의병들의 ‘진심’이 담겨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됩니다. 그러나 뭐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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