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도둑 다나카” 실명 지목 팩트 폭행…헐버트의 영문 기고문이 결정적 역할
경천사 10층 석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07년 초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는 당시 경기도 풍덕군 광덕면(현 황해북도 개풍군)에 위치했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를 알게 된 ‘대한매일신보’와 이 신문의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는 1907년 3월 7일부터 일본의 석탑 약탈을 연속 보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폭압적인 언론 환경 탓에 이 사건은 국외로 퍼지지 않았다. 한국 안에서만 요란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보도된 영어 기사 하나가 사건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1907년 4월 4일 일본 고베의 지역 언론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은 ‘한국에서의 만행(Vandalism in Korea)’이라는 현장 르포 기사를 게재했다. 한국의 독립을 외치던 미국인 헐버트 박사(Homer Bezaleel Hulbert)가 쓴 글이었다.
1907년 4월 4일 일본 고베의 지역 언론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에 게재된 경천사 10층 석탑 관련 사설(왼쪽)과 헐버트 박사의 르포 ‘한국에서의 만행(Vandalism in Korea)’. 사진=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헐버트 박사가 직접 현장을 취재하고 인근 지역 주민의 목소리까지 담은 이른바 ‘반박 불가’한 르포 기사였다. 일본이 내내 부인해 온 경천사 10층 석탑 약탈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외국인의 ‘주장’이라고 치부하기엔 생생한 현장 목소리와 증거 사진이 가득했던 까닭에 일본 언론 입장에서도 기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1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100주년선교기념관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69주기 추모식’에서 이 기사의 원문을 공개했다.
10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100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69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식사를 하는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원문에 따르면 헐버트 박사는 1907년 3월 19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송도역에 도착해 남쪽으로 11㎞쯤 떨어진 풍덕군에 도착했다. 석탑은 없었다. 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망가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석탑이 있었던 자리 근처 길 양쪽에는 깊게 파인 수레바퀴 자국이 여럿 남았었다. 지역 주민은 “우리는 이런 종류의 수레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흔적이었다.
헐버트 박사는 지역 주민을 인터뷰한 뒤 1907년 2월 18일쯤 무장한 일본인 80여 명이 석탑 주변에 쇠파이프로 이어 올린 건설용 임시 작업대를 설치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임시 작업대 쇠파이프와 기둥을 박았던 구멍도 찾았다. 송도역까지 수레가 오간 흔적 역시 헐버트 박사의 눈에 들어 왔다. 송도역에서 “석탑이 해체된 채로 남쪽 행 기차에 실렸다”는 이야기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헐버트 박사는 현장 르포와 함께 “이 사건은 단순히 부랑자가 저질렀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어느 정도 부를 가진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위”라며 “3주쯤 전 일본 황제 특별 사절로 서울에 온 다나카 미스야키 자작이 한 짓이다.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 일본 정부는 이 만행의 수혜자”라고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를 실명 지목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국적 외신 기자가 청와대 비서실장의 범죄 혐의 내용을 낱낱이 밝히며 실명 저격한 셈이었다.
거기에 “일본을 옹호하는 세력은 이를 두고 ‘한국 황제가 선물로 석탑을 일본에 줬다’고 말한다. 생각해보자. 영국 국왕이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넬슨 제독의 동상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어 줄까?”라며 “이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다. 유물을 도둑질한 사기꾼의 작위를 박탈하고 평민으로 강등하라”고 일렀다. 이 현장 르포를 보도한 ‘재팬 크로니클’도 헐버트 박사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날 기사를 인용해 ‘누가 석탑을 훔쳐갔는가(Who removed the pagoda)?’라는 사설까지 보도했다.
사설엔 일본 황실이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적혔다. “봉건시대에 축조된 많은 일본의 문화재가 잘 보존된 건 다 일본 황제의 덕이다. 일본 황제는 이제껏 ‘문화재는 파괴되면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며 “그런 황제가 타국의 약탈 문화재를 선물로 받는다는 건 논리적이지 않다. 황제가 그걸 받고 기뻐할 리 없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약탈’이란 단어까지 나왔다. “석탑의 약탈(theft)은 일본이 한국에게 자행한 그 어떤 행위보다도 가혹한 행위(bitterness)다. 일본 정부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도리는 석탑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으라고 지시하는 일이다. 헐버트 박사의 기고문과 그가 보낸 사진을 보니 사건 당사자 이름이 거론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안타깝게도 당시 사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알리는 데 여생을 바치고 있는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1940년 ‘재팬 크로니클’을 인수한 ‘재팬 타임스’에 서한을 보내 헐버트 박사가 보낸 당시 사진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사진을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이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갔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 뒤 더욱 탄력을 받았다. 헐버트 박사의 글은 당시 지구 반대편의 뉴질랜드 지역 신문에도 인용돼 실릴 정도였다.
1907년 7월 25일자 뉴질랜드 지역 신문 ‘템스 스타’에 실린 ‘한국의 석탑(A Korean Shrine)’ 기사. 사진=템스 스타 DB
‘일요신문’이 입수한 1907년 7월 25일자 뉴질랜드 지역 신문 ‘템스 스타’에는 실제 ‘한국의 석탑(A Korean Shrine)’이란 제목으로 일본의 경천사 10층 석탑 약탈 내용이 담겨 있었다. ‘템스 스타’는 뉴질랜드 북섬의 템스와 코로만델 지역 신문이었다. 템스와 코로만델은 제주도 정도 크기로 현재 인구는 3만 명도 안 되는 지역이다.
기사에는 “일본이 최근 한국에서 벌인 강압적인 행위 때문에 문제시되고 있다”며 “일본의 무장한 군인이 풍덕 석탑(P’ung-duk pagoda)을 조각 낸 뒤 포장해 수레에 실었다. 일본으로 향할 수 있게 마산포항으로 기차를 타고 옮겨졌다”고 적혀 있었다. “풍덕 지역 공무원이 일본에게 뇌물을 받았거나 협박을 받아 반출 금지를 풀어줬다고 알려졌다”는 내용까지 상세히 담겼다.
헐버트 박사는 원문에 다나카 미스야키를 궁내대신(Minister)이라고 한 번 표기한 뒤 계속 자작(Viscount)이라고 격하해서 썼다. 이 신문 역시 행위자를 자작이라고 계속 표기했다. 언론은 누군가를 치켜 세울 때 그 인물의 가장 높은 직위를 선택하고 격하할 때 가장 낮은 직위를 적어 넣는다. ‘가혹한 행위’를 일컫는 영어 단어(Bitterness) 등 헐버트 박사의 단어 선택은 시골 마을에까지 인용돼 퍼졌다.
당시 일본이 가장 신경 썼던 건 국제 사회의 여론이었다. 19세기 후반 열강은 잦은 전쟁으로 국방비가 급증해 재정 부담을 줄이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1899년 5월 18일부터 7월 29일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인 열강 26개국은 제1차 만국평화회의를 열고 전쟁을 줄이자는 대승적 협의를 도출하기까지 했다.
전세계가 한 목소리를 내다 보니 일본은 단독 강점이나 식민지화가 쉽지 않다는 걸 느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문화재 약탈이 외신을 타고 뉴질랜드 작은 도시까지 전해졌다. 일본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은 “이러한 일로 일본이 국제적 망신을 당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 정부에 석탑을 돌려줄 것을 건의했다. 한국을 통치하던 통감부도 석탑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일본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1918년 경천사 10층 석탑은 한국의 품으로 되돌아 왔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헐버트와 함께했던 영국인 기자 베델 대한매일신보 발행…일제 만행 만천하에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곳은 ‘대한매일신보’다. 1907년 3월 7일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했다”고 폭로했다. 1907년 6월까지 3개월 동안 끈질기게 이 사건을 연속 보도했다. 어니스트 베델.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영국 브리스틀에서 1872년 11월 3일에 태어났던 베델은 10대 때부터 32세까지 일본에서 무역상을 하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영국의 언론사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파원 자격으로서 한국에 왔다. 베델은 당시 ‘데일리 크로니클’ 소속으로는 제대로 된 기사 작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동맹국 일본을 비판하는 데 소홀했던 까닭이었다. 베델은 곧 ‘데일리 메일’을 그만두고 1904년 7월 18일부터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베델은 발행인에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일본의 사전 검열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발행인이 영국인이니 영국 회사로 분류됐던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양기탁 외에도 신채호, 박은식 등이 베델과 함께 일본을 비판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부수는 1만 부를 넘어 한국 최대 신문사가 됐다. 베델은 일본에게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영국에게 부탁해 베델의 본국 송환을 시도했다. 베델은 두 차례나 법정에 서며 무고한 죄로 형을 받으면서도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일본 비판은 멈출 줄 몰랐다.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등 일본을 향한 계속 날카로운 비판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던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눈을 감으며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8년 대한민국에 의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헐버트 박사와 함께 묻혀 있다. [최] |
헐버트 박사의 한글사랑…그가 아녔다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실 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 세워진 헐버트 사진. 사진=일요신문 DB 한글은 애초 띄어쓰기가 없었다. 불편한 소통이 계속되자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에게 이런 불편을 이야기했다. 이는 ‘독립신문’이 띄어쓰기를 처음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한글을 읽고 쓰며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헐버트 박사다. 헐버트 박사는 고종에게 국문연구소를 만들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1893년 8월에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도 고안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로 된 최초의 교과서도 만들었다. 1890년 세계 지리, 각 나라의 제도, 천체 관련 총서를 만들어 ‘사민필지’라고 이름 붙였다. 사민필지는 선비와 서민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사민필지는 161쪽 전체에 한자가 하나도 없다. 서문에서 “중국 글인 한문으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지 못하고 널리 볼 수 없으며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 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고 썼다. 더 중요한 건 책의 내용이었다. 헐버트 박사는 책 곳곳에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모두가 배움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평등 사상을 심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인에게 세계를 가르치는 책이었고 한글이 널리 쓰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6년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악보로 남기기까지 했다. 고종의 밀사로 일본의 부당한 행위를 세계에 알리려 했던 헐버트 박사는 일본이 빼앗아 간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데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최근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종의 예치금 증서가 주목을 받으며 재조명됐다. (관련 기사: ‘미스터 션샤인’ 고종의 예치금 증서 실체, 그 뒤에 숨겨진 헐버트의 노력)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에 헐버트 박사 서거 추모식을 열고 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