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구 규칙집 번역 과정 정체불명 용어 유입…자정 노력에도 현실어 바꾸기 쉽지 않아
# 일본식 야구 용어, 왜 바로잡기 시작했나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야구장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면서도 미국 야구장에 가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상당수였다. 분명히 영어로 만들어진 단어인데 영어 문법에는 전혀 맞지 않은 표현도 수두룩했다. 1990년대 이후 야구 전문 기자들과 방송 중계진을 중심으로 부정확한 야구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유다. 한 야구 관계자는 “한국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처럼 규모가 큰 국제대회에 처음 나가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얼마나 다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며 “그 후 야구계 전반에 최대한 정확하게 야구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한국어로 적합한 표현을 만드는 게 먼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를 찾아가야 한다는 방향이 생겼다”고 전했다.
실제로 KBO와 대한야구협회는 2006년 한국 야구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인 ‘야구용어위원회’를 한시적으로 발족해 올바른 야구 용어 정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평균자책점’과 ‘볼넷’과 같은 중요한 단어들이 한국 야구에서 제대로 쓰이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사회적 합의 속에 통용되던 단어를 하루아침에 다른 말로 대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단어들은 이미 너무 많은 이들에게 대체 불가한 용어로 각인됐고, 모두가 틀린 표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체 단어가 너무 어색하거나 길고 어려워 기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현실 언어’를 바꾸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다. 언론과 방송에서 올바른 표현으로 바꿔 쓴다 해도, 현장 야구인들에게는 여전히 입에 착착 붙는 ‘구전’ 용어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 단어는 감독과 코치들 입을 통해 다시 젊은 선수들에게 전파된다. 요즘은 야구팬들이 야구 경기나 상황과 관련한 각종 신조어를 만드는 데 재미를 붙였다. 그중 일부는 여러 야구 커뮤니티를 통해 널리 유행하면서 사실상 ‘야구계의 표준어’처럼 자리 잡았다.
# 직구·방어율·장타율은 왜 말이 안 되나
‘직구(直球)’는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대표적 사례다. 너무 흔하고 너무 자주 쓰여서 오히려 다른 용어로 대체하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쓰는 ‘스트레이트 볼’을 직역해 ‘직구’가 됐다. 직선으로 곧게 날아가는 공이라는 의미일 텐데, 사실 휘지 않고 똑바로 날아가는 구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구종에 비해 좌우와 상하 움직임이 가장 덜할 뿐이다. 미국에서는 ‘패스트볼(fastball)’이라고 표현한다. 투수들이 던지는 가장 빠른 구종이라서다. 최근 많은 언론과 방송에서 ‘속구’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변화구’ 역시 애매한 표현이다. 모든 공의 궤적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브레이킹 볼(breaking ball)’이라 부른다.
‘직구’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방어율’은 아예 수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KBO 야구용어위원회가 발족됐을 때, 가장 먼저 교정에 나섰던 용어 중 하나다. 방어율은 투수가 9이닝을 던졌다고 가정했을 때 자책점을 얼마나 줬는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오랜 기간 사용됐다. 하지만 오류가 많다. 기록 이름에 ‘율(率)’이라는 단어가 포함됐다면, 타율이나 출루율처럼 0부터 1 사이에서 ‘비율’을 계산하는 숫자여야 한다. 또 ‘방어를 한 비율’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숫자가 높을수록 잘한 것으로 평가돼야 말이 된다. 방어율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논리에 따라 방어율을 대체하는 용어로 선택된 게 바로 ‘평균자책점’이다. 단어 앞에 ‘9이닝당’이라는 표현이 생략됐을 뿐, 이 기록이 가진 특성에 가장 근접한 용어다.
‘장타율’도 마찬가지다. 이름만으로는 타자의 총 안타 수에서 장타가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한 값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타수당 얼마나 많은 루타를 기록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단타 수+(2루타 수*2)+(3루타 수*3)+(홈런 수*4)’를 타수로 나누는 방식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최대 값이 1인 타율이나 출루율과 달리, 장타율 값의 최대치는 4가 된다. 일부에서 ‘평균 루타 수’라는 표현을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을 펼친 이유다. 그러나 이 단어 역시 많은 언론과 방송에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직구나 방어율과 마찬가지로 워낙 ‘고전적’으로 쓰이는 일상 용어라서다.
사진 출처 = SK 와이번즈 홈페이지
‘포볼’과 ‘데드볼’도 ‘방어율’과 같은 시기에 바로 잡은 단어다. 얼핏 보면 영어 단어 같지만, 실제 미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용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쓰던 ‘4구(四球)’와 ‘사구(四球)’를 의미 그대로 가져와 만들어낸 한국식 영어인 셈이다. 지금은 각각 ‘볼넷’과 ‘몸에 맞은 공’으로 교정됐다.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는 정식 용어는 각각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와 ‘히트 바이 피치트 볼(hit-by-pitched ball)’이다. 볼넷은 타자가 1루로 걸어 나간다는 의미에서 ‘워크(walk)’라는 표현으로도 많이 쓰인다.
야구 골수팬들에게는 익숙한 ‘랑데부(rendezvous) 홈런’과 ‘굿바이 홈런’도 일본에서 건너온 대표적인 용어다. 전 세계에서 일본만 쓰는 표현을 한국이 가져와 초창기에 자주 사용했다. 차례로 홈런을 친 두 타자가 홈에서 ‘랑데부’하고, 홈런 한 방으로 관중들과 ‘굿바이’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기발하긴 하다. 하지만 적확한 용어는 아니다. 심지어 ‘굿바이 홈런’은 일본식 표현인 ‘사요나라 홈런’을 영어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제는 ‘연속타자 홈런’과 ‘끝내기 홈런’이라는 표현을 상용하고 있다. 메이저리그식으로 ‘백투백(back-to-back) 홈런’이라는 용어도 많이 쓴다.
‘그라운드 홈런’ 역시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가 사용된 용어다. ‘그라운드 안에 떨어졌는데도 홈런이 됐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해지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 쓰는 정확한 용어는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inside-the-park home run)’이다. 단어가 너무 길어 한국에선 ‘장내 홈런’이라는 표현을 만들었고, 일본은 ‘러닝 홈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번 타자를 뜻하는 의미로 오래 쓰였던 ‘톱타자’ 역시 일본에서 생겨난 정체불명 용어다. 일부에선 각 이닝을 개시하는 선두 타자에게도 이 표현을 쓰곤 했다. 어느 쪽이든 톱타자는 틀린 표현이다. 메이저리그에선 1번 타순에 이름을 올린 타자에게 ‘리드오프(lead off)’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백넘버’ 역시 한국에서 잘못 정착된 ‘콩글리시’ 단어다. 미국에서는 ‘유니폼 번호’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등번호’라는 단어를 표준어로 여긴다. 투수들이 주자에게 스타트 타이밍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간결하고 빠르게 투구하는 동작도 ‘퀵 모션’이라는 용어로 줄곧 사용돼왔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는 정식 표현은 ‘슬라이드 스텝(slide step)’이다. 땅에서 발을 살짝만 들었다가 홈플레이트 쪽으로 부드럽게 슬라이드하면서 던진다는 뜻이다. ‘사이클링 히트’는 한 경기에서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모두 친 타자에게 주어지는 기록이지만, 정확한 용어는 ‘힛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다. ‘프리 배팅’도 실은 ‘배팅 프랙티스(batting practice)’가 정확한 표현이고, 투수의 제구력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코너 워크’는 미국에서 ‘로케이션(location)’이라는 용어로 쓴다.
‘백넘버’ 역시 잘못 정착된 ‘콩글리시’다. 미국에서는 ‘유니폼 번호’, 한국에서는 ‘등번호’라는 단어를 표준어로 여긴다. ‘백넘버’ 역시 한국에서 잘못 정착된 ‘콩글리시’ 단어다. 미국에서는 ‘유니폼 번호’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등번호’라는 단어를 표준어로 여긴다. 사진 출처 = 넥센 히어로즈
과거 야구 중계에서 종종 들리던 출처 불명 단어들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다. ‘언더베이스(on the base)’는 ‘태그업(tag-up)’ 혹은 ‘리터치(retouch)’로 수정됐고, 타구 하나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는다는 의미로 쓰이던 ‘겟투(get two)’도 이제는 ‘더블 플레이’로 고쳐 쓰고 있다. 타자의 배트가 반만 돌았을 때 ‘하프 스윙’이 아닌 ‘체크 스윙’이라 표현하게 됐고, 번트 자세를 취하다 갑자기 강공으로 전환하는 작전도 ‘버스터(buster)’가 아니라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fake bunt and slash)’로 맞게 쓰이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케네디 스코어, 그런 말 실제론 없다’ ML서 건너온 야구 용어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탄생하고 빅리그 경기가 중계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야구에도 메이저리그에서만 쓰이던 단어들이 많이 유입됐다. ‘퀄리티 스타트(quality start)’가 대표적이다. 선발 투수가 6이닝 이상 투구하면서 3자책점 이하를 내줬다는 뜻의 이 기록은 ‘호투했다’ ‘역투했다’ ‘쾌투했다’ 등의 표현으로 대체되던 선발 투수의 활약도를 구체적으로 수치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 에이스로 활약하던 시절, 그의 퀄리티 스타트 수를 세는 것은 한국 야구팬들에게 큰 즐거움이기도 했다. 1번과 2번 타자를 묶어 부르는 ‘테이블 세터(table setter)’도 뒤늦게 미국에서 건너온 용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현장 야구인들 가운데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제는 ‘클린업 트리오’만큼 널리 쓰인다. ‘베이스’라는 테이블 위에 3~5번 중심 타선이 쓸어 담을 수 있도록 ‘주자’라는 밥상을 차려준다는 의미의 단어. 어찌 보면 고급 비유가 담긴 문학적인 표현이다. ‘불펜(bull pen)’도 한국에서는 원래 투수들이 몸을 푸는 장소로 통했지만, 언젠가부터 메이저리그와 마찬가지로 구원 투수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한 스포츠 전문 매체는 “A 팀 불펜진이 선발진보다 강력하다”는 기사를 쓰기 위해 ‘펜(pen)은 칼보다 강하다’는 유명한 문장을 차용하기도 했다. 직구를 의미하는 포심패스트볼 외에 투심패스트볼, 컷패스트볼, 싱킹패스트볼처럼 직구를 변형시킨 여러 구종들도 미국 출신의 외국인 선수들을 통해 한국 프로야구에 전파됐다. 야구 경기가 없는 겨울이면 구단들과 선수들이 난로(stove) 앞에서 몸값과 이적 계약을 논의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단어 ‘스토브 리그’도 이제 비시즌마다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KIA 양현종 선수. 사진 출처 = KIA 타이거즈 홈페이지 왼손 투수를 뜻하는 은어 ‘사우스포(southpaw)’는 자주 사용하는 미국인들도 어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람의 손을 뜻하는 ‘포’에 남쪽을 뜻하는 ‘사우스’가 결합됐는데, 굳이 동서남북 가운데 남쪽을 표기한 숨은 이유가 있다. 조명 장치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 대부분의 야구장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에 타자들이 시야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타석이 동쪽을 바라보는 구조로 지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투수들은 서쪽 방향을 향해 서게 됐고, 자연스럽게 왼손 투수는 동쪽을 등진 채 남쪽으로 손을 뻗어 공을 던지는 모양새가 됐다. 반면 메이저리그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진 ‘케네디 스코어’는 실제로 미국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을 통해 퍼진 어원에는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붙어 있다. 1960년 미국 대선 토론회에서 한 기자가 야구광으로 유명했던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디에게 기습적으로 “어느 점수의 경기가 가장 재미있느냐”는 질문을 했고, 케네디 후보가 “8-7이 가장 재미있다”고 답하면서 ‘가장 재미있는 야구 스코어’라는 의미의 신조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나 관련 서적 어디에도 이 에피소드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웬만한 야구 용어나 은어가 다 들어 있는 폴 딕슨의 ‘베이스볼 딕셔너리’에도 ‘케네디 스코어’라는 단어는 없다. 오히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1937년 뉴욕타임스 야구기자 제임스 도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팽팽한 투수전도 좋아하지만 홈런이 터지면서 큰 점수가 나는 경기에 더 큰 희열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기 스코어는 8-7”이라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8-7은 사실 ‘케네디 스코어’가 아니라 ‘루즈벨트 스코어’ 쪽이 더 정확한 셈이다. 물론 ‘루스벨트 스코어’ 역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