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코치 선수 모두 ‘3인 1실’ 원칙…5평 크기에 냉장고 헤어드라이어도 없어 ‘복병’…막내 ‘방졸’은 빨래 담당
아시안게임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주 드문 기회다. 이 때문에 유독 선수 선발 과정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일부 선수가 병역 기피 관련 논란에 휩싸여 손가락질을 받았고, 최종 엔트리 발표 시기가 너무 일렀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 와중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선수들이 깊은 부진에 빠지거나 부상으로 이탈하는 긴급 상황도 벌어졌다.
이 모든 우여곡절을 뒤로한 채 ‘선동열 호’는 닻을 올렸다. 이제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고, 온 국민은 한 마음으로 금메달을 염원하는 일만 남았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자부심은 선수들에게 없던 힘도 불어넣어 주기 마련이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한 선수는 “처음 프로에 입단했을 때도 자부심이 생겼지만, 아무래도 대표팀은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곳이라는 생각에 더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눈을 빛냈다.
23일 인천국제공항에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어려움이 많았던 선수 선발
2018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은 지난 6월 11일 최종 엔트리 24인을 발표했다.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의 최종엔트리 마감일은 6월 30일. 하지만 대한체육회가 각 단체에 “가급적 한 달 빠른 5월 31일까지 최종 참가명단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류 제출과 가이드북 제작을 비롯한 제반 업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이 시한을 조금 늘려 KBO에 “6월 15일까지 엔트리를 확정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결국 야구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KBO 리그 경기가 없는 6월 11일 월요일에 부랴부랴 모여 엔트리를 추렸다.
선수 선발대회를 이미 마친 아마추어 종목이나 선수층이 얇은 일부 종목은 이 시기에 엔트리를 제출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야구와 축구처럼 선발선수 범위가 넓고 최종 멤버를 추리기 어려운 인기 종목은 다르다. 전원 사회인 선수로 구성된 일본 야구대표팀은 6월 18일, 프로선수 10명이 참가하는 대만 야구대표팀은 6월 27일에 각각 최종 엔트리를 확정해 발표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아예 7월 16일에 최종 엔트리를 공개했다. 한국 야구대표팀의 발표 시점이 다른 국가나 축구대표팀에 비해 유독 빨랐다.
선동열 감독이 가장 고민했던 지점도 이 부분이다. 엔트리 발표 시점인 6월 11일부터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시작되는 8월 16일 사이엔 무려 두 달여의 시간이 있다. 프로 리그가 한창이라 선수들의 기량이나 몸 상태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후 많은 돌발상황이 생겼다.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가 갑자기 부진에 빠지거나, 고민 끝에 탈락시킨 선수가 좋은 성적으로 상승세를 타는 사례가 자주 나왔다.
대회를 코앞에 둔 8월에 접어들어서도 위기는 계속됐다. 외야수 박건우(두산)와 내야수 최정(SK)이 경기 도중 각각 옆구리와 허벅지에 부상을 입어 출전이 불가능해졌고, 투수 정찬헌(LG)은 2016년 수술했던 흉추 부위 통증이 재발했다. 대표팀 마운드의 주축으로 기대를 모았던 투수 차우찬(LG)은 후반기 10경기에서 평균자책점 9.29를 기록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 최종 엔트리 교체는 필연적인 일이 됐다.
결국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8월 13일 다시 모여 최종 엔트리 네 자리를 교체했다. 앞서 언급한 네 선수가 하차하고 투수 장필준(삼성)과 최원태(넥센), 내야수 황재균(KT), 외야수 이정후(넥센)가 극적으로 승선했다. 대표팀 선수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던 KT는 황재균이 마지막 순간에 이름을 올리면서 체면을 세웠고, 넥센은 군미필자이자 투타의 기둥인 최원태와 이정후가 발탁돼 가장 큰 행운을 잡게 됐다.
# 국가대표 등번호와 숙소 배정은 어떻게?
대표팀은 KBO 리그 중단 후 하루 휴식을 취하고 18일부터 잠실구장에서 합동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 소집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전염병 예방주사 접종. 최종 엔트리 1차 발표 때 선발된 선수들은 이미 예방주사를 맞은 뒤였고, 추가 발탁된 네 선수는 엔트리 교체 발표 다음날 오전 병원으로 향해 부랴부랴 주사 접종을 끝냈다.
국가대표 유니폼은 홈 세 벌, 원정 세 벌을 합쳐 총 여섯 벌씩 지급됐다. 유니폼에 달게 될 등번호 배정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KBO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선수들에게 희망 번호를 먼저 제출받았는데, 대부분 소속팀에서 쓰던 등번호를 그대로 쓰기를 원했다”며 “그 안에서 겹치는 번호가 나올 경우엔 선수들끼리 협의해 한쪽이 양보하는 방식으로 정했다”고 했다.
소속팀에서 나란히 1번을 달고 있는 임찬규(LG)와 박민우(NC) 중에서는 임찬규가 자신의 등번호를 지키게 됐다. 임찬규는 원래 1번의 주인이던 우규민이 지난해 삼성으로 이적한 뒤 ‘에이스 번호’로 통하는 1번을 물려받아 사용해왔다. 박민우는 자신의 번호인 1번 대신 소속팀 선배이자 롤 모델인 내야수 손시헌의 등번호 13번을 달기로 했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는 김현수(왼쪽)와 이정후(오른쪽). 그리고 최원태(가운데). 연합뉴스
대체 선수로 발탁된 이정후는 팀에서 51번을 쓰지만, 이 번호는 이미 최충연(삼성)이 가져간 상태였다. 고민 끝에 한 번도 달아보지 않은 17번을 선택했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축구 대표팀 이승우(헬라스 베로나)와 같은 번호를 달고 아시안게임을 함께 누비겠다는 의미에서다. 이정후는 “내가 중학교 때 7번, 고등학교 때 1번을 달아서 언젠가는 ‘17’이라는 번호를 한 번 써보고 싶었다”며 “승우에게 ‘등번호가 몇 번이냐’고 물어보니 마침 17번이라고 하기에 나도 이 번호를 쓰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합숙 훈련을 시작한 대표팀 선수들은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에 짐을 풀었다. 훈련 장소인 잠실구장과 가까워 시즌 중 지방 구단들이 서울 경기 숙소로도 많이 사용하는 장소다. 쾌적한 휴식을 위해 전원이 1인 1실을 썼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각기 다른 층을 사용했다. 지방 구단 소속인 한 선수는 “숙소 로비에 와 있는 팬들의 수를 보고 내가 국가대표팀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각 팀에서 야구를 잘하거나 인기 있는 선수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평소 소속팀 원정을 다닐 때보다 훨씬 많은 팬들이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가는 모습을 봤다”고 귀띔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최고 사양의 장비가 지급된다. 대부분 KBO와 계약한 공식 업체에서 지원을 한다. 올해 대표팀 장비 수급은 해외 브랜드 D 사가 맡았다. 선수들은 대체적으로 “만족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일부 선수는 “스파이크는 의외로 선수들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아무래도 새 스파이크보다는 평소 지원을 받던 제품이 익숙하다”고 했다. 최적의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 장비를 사용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이런 경우엔 사유서를 내고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의 신발을 착용할 수 있다. 다만 D사 외에 다른 브랜드는 노출시키지 않는 게 원칙이라 반드시 신고 있는 스파이크의 상표를 가려야 한다.
# 선수촌은 다인실, 방장과 방졸의 고민
한국에서의 합숙 훈련은 사실 어렵지 않다. KBO의 전폭 지원 속에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다. 자카르타 현지에선 다르다. 당초 장애물로 예견됐던 더위는 오히려 한국보다 심하지 않은 수준. 오히려 선수촌 내부 시설이 복병으로 떠올랐다. 대회가 끝난 뒤 선수촌을 아파트로 분양하기 위해 실내를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놓은 탓이다. 다섯 평 정도 되는 방 안에 침대 3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 선수들이 짐가방을 놓을 자리조차 마땅치 않다는 후문. 화장실 역시 한 사람이 겨우 샤워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가뜩이나 일반인보다 덩치가 큰 야구선수들에게는 힘겨운 공간이다. 선동열 감독은 “답사 때 침대에 미리 누워보니 키 184cm인 내가 딱 머리부터 발끝까지 닿을 정도의 길이였다”고 했다. 심지어 방 안에는 냉장고나 전기포트, 헤어드라이어도 없다. 이 소식을 미리 접한 대표팀 지원 스태프가 냉장고 대용으로 쓰기 위한 아이스박스를 따로 챙겨 갔을 정도다. 출국 전 선 감독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선수들이 인근 호텔에서 지내면 안 되겠느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타 종목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곧 없던 일로 했다. 대신 선수촌 인근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목욕탕과 식당을 미리 섭외해 놓았다.
출국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선수들. 연합뉴스
이뿐 아니다. 감독이든 코치든 선수든 예외 없이 ‘3인 1실’이 원칙이다. 선 감독도 대표팀에 동행하는 코치 6인 가운데 어느 코치를 ‘방졸’로 삼을지 고민해야 했다. 수석 코치 역할을 하는 이강철 코치를 일찌감치 룸메이트로 낙점한 뒤 남은 침대 하나에는 대표팀 코칭스태프 가운데 막내인 진갑용 코치를 들이기로 했다. 선 감독은 “진갑용 코치는 덩치가 가장 커서 처음에는 생각을 안했지만, 그래도 막내니까 적임자라고 생각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른 한 방은 이종범-정민철-김재현 코치가 나란히 쓰게 됐고, 유지현 코치는 유일하게 대표팀 지원 업무를 맡은 KBO 직원들과 한 방에서 동고동락한다.
선수들 역시 고참급-중간급-막내급으로 3인씩 짝을 이뤄 룸메이트를 정했다. 좁은 방 안에서 원활하게 소통하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려면 익숙한 사이이거나 말이 통하는 선후배여야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 같은 포지션이나 같은 팀 선수들끼리 한 방에 모였다. 넥센에서 함께 뛰는 박병호-김하성-이정후가 같은 방을 쓰는 이유다.
무엇보다 막내 방졸에게는 중요한 임무 하나가 있다. 바로 ‘빨래’다. 소속팀에서 원정을 다닐 때는 숙소에서 빨랫감을 챙겨 내놓기만 하면 세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선수촌 입촌과 동시에 선수들이 알아서 빨래를 해결해야 한다. 이 역할이 주로 막내의 몫이다. 대표팀 투수진 가운데 가장 어린 박치국은 이 소식을 듣고 “설마 손빨래를 해야 하느냐”고 걱정하다 세탁기가 있다는 얘기에 안심하기도 했고, 2014년 인천 대회에서 선배 두 명과 한 방을 썼던 손아섭(롯데)은 “이번엔 우리 방에 후배가 한 명은 들어올 테니 빨래 당번은 졸업하겠다”며 짐짓 기뻐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사연이 넘치는 국가대표 생활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한국 야구와 아시안게임 ‘98년부터 프로 첫 참가’ 야구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시범 종목으로 처음 도입됐다. 한국, 일본, 대만, 중국까지 4개국이 참가했고, 전패한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나라가 서로 물고 물리면서 2승 1패로 동률을 이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4년 뒤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마침내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 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연세대 문동환과 고려대 조성민을 비롯한 대학 에이스들을 총출동시켜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무실점 행진을 펼치는 기세를 뽐냈다. 그러나 결승에서 일본에 5-6으로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부터는 처음으로 프로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른바 한국 야구의 국가대표 ‘드림팀 1기’다. 프로 10명과 아마 10명, 그리고 해외파인 박찬호와 서재응으로 구성됐다. 아마 선수들 가운데엔 성균관대 김병현이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선수단 전원이 군 미필자. 목표의식도 확실했다. 결승에서 일본에 13-1로 7회 콜드게임승을 거두고 6전 전승으로 가볍게 금메달을 땄다. 물론 아시안게임에서의 한일전은 ‘라이벌전’의 의미가 없다. 일본은 프로 선수들을 아시안게임에 내보내지 않는다. 이미 야구로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출전하지 않는 아시아 대회를 위해 자국 정규리그를 중단하면서까지 최고의 선수들을 파견하는 희생은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일본은 한국과 달리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프로 선수들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군 대체 복무라는 최고의 혜택(올림픽은 금·은·동 모두 해당)을 받게 되지만, 일본 선수들은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때문에 아시안게임에선 일본이 아닌 대만이 한국의 ‘난적’으로 여겨진다. 대만 역시 아시안게임에 늘 최정예 멤버를 내보내고 있어서다.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해외파 선수들 없이 이승엽, 송진우, 이상훈 등 국내 선수들의 활약만으로도 6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불러 모은 대만과 프로 1.5군 선수들을 일부 내보낸 일본을 모두 꺾었다. 그러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은 한국 야구 역사에 ‘참사’라는 단어를 남겼다. 아시안게임 태극마크를 병역 혜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린 대회였다. 군 미필자 위주의 국내파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다가 해외파가 총출동한 대만에 일격을 당해 금메달을 날렸다. 게다가 프로 선수가 단 한 명도 출전하지 않은 일본을 상대로 그해 최고 선발 투수(류현진)와 최고 마무리 투수(오승환)를 모두 내보내고도 패했다. 이후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대한 경각심이 재정비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는 메이저리거 추신수와 일본에서 뛰던 김태균이 합류했다. 그해 타격 7관왕 이대호,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류현진도 모두 참가했다. 한국은 5경기를 모두 5점차 이상(콜드게임 2경기 포함)으로 여유 있게 끝내면서 다시 금메달로 명예 회복을 했다. 4년 뒤 안방에서 열린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3승으로 준결승에 진출한 뒤 중국과 대만을 차례로 꺾고 다시 왕좌에 올랐다. 이번 대회 역시 한국의 목표는 오로지 ‘금메달’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