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수제자’로 입문, 병마로 링과 작별…후배들 “이왕표 뜻 잇겠다”
이왕표 대표 빈소. 연합뉴스
[일요신문] 지난 4일, 프로레슬링계 비보가 날아 들었다. 프로레슬링계 거목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가 별세했다. 향년 64세. 지난 2013년 담도암 판정을 받았지만 회복 소식이 전해졌고, 이후로도 최근까지 활동을 이어왔다. 이에 갑작스런 사망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사인은 재발한 암이었다. ‘영원한 챔피언’이지만 다시 찾아온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왕표 대표를 추모하는 개코의 소셜미디어 계정. 사진=개코 인스타그램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오던 이 대표는 2013년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병세가 심해 위험한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을 앞두고 유언 형태의 말을 남길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었다.
다행히 수술 이후 회복이 됐고, 병상에서 일어나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링 위에 올라 은퇴식을 치렀다. 별도로 은퇴경기까지 가지려 했지만 끝내 건강상의 이유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지난달 암이 재발한 것이 발견됐고 곧바로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한 차례 위기를 맞았던 건강은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영원한 챔피언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사회 각계각층에서 추모와 관심이 이어졌다. 타계 당일인 4일에는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프로레슬러이기도 한 김남훈 해설위원, 래퍼 개코 등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조의를 표했다. 지난 2015년 이 대표가 출연했던 JTBC ‘뉴스룸’에서는 손석희 앵커가 한 코너에서 그를 추억하기도 했다.
특히 이낙연 국무총리의 트위터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총리는 이 대표의 타계 당일 “그동안 꿈을 주셔서 감사했다. 또 한 시대가 간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날에는 직접 빈소를 찾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100개가 넘는 근조 화환이 가득 찼다. 많은 이들이 그를 추억했고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 링 위에 선 40년
1975년 ‘박치기 왕’ 김일 체육관 1기생으로 입문한 이 대표는 가장 오랜 기간, 가장 꾸준히 레슬링계를 지켜온 인물이다. 한국프로레슬링연맹의 대표이자 대한종합격투기협회 총재로 ‘프로레슬링의 상징’이 되기까지 수많은 경기와 사건을 거쳐 왔다.
연습생으로 입단 이후 링 위에 서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고된 훈련을 견디고 시간이 흐른 1978년 데뷔 무대에 섰다. 훈련 과정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수차례 억누르고 데뷔했지만 레슬러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데뷔전 패배 이후 내리 20연패를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레슬러가 됐지만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연패에 회의감을 느끼고 ‘어둠의 세계’에 몸을 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명동 거리를 배회하다 선배들에게 잡혀 다시 체육관으로 향했다. 김일 선생에게 호되게 혼난 이후 다시 링으로 복귀했다.
일본 오사카 원정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두며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됐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오랜 기간 활동했고, 세계레슬링연맹(GWF)에 소속되며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기도 했다. 이 기간 헐크 호건, 부커 티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세계적 프로레슬러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밥 샙과 재경기를 펼치기도 했던 이왕표 대표. 연합뉴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GWF, WWA 챔피언 자리를 오랫동안 방어하며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표 스타로 올라섰다. 2008년에는 종합격투기(MMA)로 활동 무대를 옮겨 밥 샙과 경기를 치러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에게 항상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일부에서 ‘이왕표 외에는 잘 모르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하고 밥 샙과의 경기에서는 ‘만들어진 경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대표는 “스스로 밥 샙과 경기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죄송스러운 마음”이라고 최근 밝힌 바 있다. 이에 프로레슬링계 한 인사는 “평소에는 욕을 하던 사람들이 사후에 과도한 추모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꼬집기도 했다.
# 후배들이 기억하는 이왕표
이왕표 대표는 지난 5월 한 팟캐스트 방송에 직접 출연해 본인을 “레슬러 이왕표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끝까지 레슬러의 자존심을 잃지 않던 그는 김일 선생이 그랬듯 후배 양성에도 힘써왔다. 그의 빈소에는 많은 후배들이 찾아 자리를 지켰다.
최근까지 그의 곁을 지킨 제자이자 후배 ‘수문장’ 홍상진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부대표는 스승의 타계에 대해 “참 안타깝다”면서 “한 달 전에도 함께 식사를 했고 보름 전에도 병원 검사 이후 운동을 하겠다고 하셔서 운동화도 사다 드렸다. 그러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김일 선생님과 함께 하늘에서 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후배들이 한국 프로레슬링을 다시 한 번 잘 이끄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고인의 뜻을 잇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현역 프로레슬링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조경호와 김민호도 고인을 추억했다. 조경호는 “17살 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어서 찾아가 처음 뵙게 됐다”며 “지난 5월 타이틀전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해 울고 있는데 칭찬에 인색하시던 이왕표 대표님이 많이 칭찬해 주셨다. 인정받는 기분이라 기뻤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팬이었고 졸업 이후 ‘이왕표 사단’의 훈련생이 됐다는 김민호는 “일본 메이저 단체인 노아(NOAH) 유학길에 바래다주시고 용돈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데뷔 축하 선물로 링슈즈를 직접 맞춰 주기도 하셨다”고 했다. 이어 “이후 10년이 지나 그 링슈즈를 신고 그분이 챔피언이셨던 극동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직접 벨트도 채워 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불과 4달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 병원서 검사를 받으실 때 부축해 드렸는데 손을 잡으며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 게 가슴에 남는다. 건강하실 때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이다”라고 덧붙였다.
링 위에서 누구보다 강한 모습을 보인 이왕표 대표였지만 병은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후배들이 그의 뜻을 받아 링을 지킬 예정이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각막은 이동우에게”…장기기증 약속으로 화제 한국 프로레슬링의 상징이던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는 타계소식 이후 장기기증 약속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게 됐다. 이 대표는 지난 2013년 최초 암 수술 당시 아내에게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더불어 자신의 각막은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는 개그맨 이동우 씨에게 기증할 뜻을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이 다시 한 번 회자되며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이 대표의 사망 당일에는 이동우 씨의 이름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오르내렸다. 하지만 고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 각막기증은 이미 2013년 당시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 씨가 앓고 있는 병은 각막기증을 받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씨는 ‘마음만 받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장기기증 또한 암환자였기에 이뤄지지 못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