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단서·지시 흐름 등 담겨, 판사 50여 명에 일일이 확인…“양승태 책임 여부 가리는 것만 남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임종헌 전 차장을 15일과 17일 두 차례에 걸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 검찰은 “앞으로 한두 차례는 더 불러서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만큼 확인할 게 많다는 뜻인데 임 전 차장은 검찰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은 ‘혐의 입증에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왜일까.
서울 서초구 대법원 본관 중앙홀 한쪽 벽면에 걸려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초상화
# 판도라 상자 된 임종헌 전 차장의 ‘USB’
‘일요신문’ 취재 결과 검찰이 자신감 있게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고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될 때마다 법원을 비판할 수 있던 배경에는 임종헌 전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핵심 관계자는 “검찰 수사 초반에는 수사를 어디까지 펼쳐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그 반전의 계기가 임종헌 전 차장의 USB였다. 그 안에서 수사의 큰 맥락을 다 만들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지난 7월 21일, 검찰은 임종헌 전 차장의 자택과 변호사 사무실 압수수색을 통해 사무실 직원의 가방에서 USB를 찾았다. 해당 USB 안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5월 25일 공개한 410개 문건 외에 새로운 문건이 들어있었다.
일부는 삭제됐지만 복원을 통해 USB에 저장돼 있던 법원 내부 자료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의 양은 수천 건에 달할 정도로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검찰은 이를 토대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핵심 내용과 보고 및 지시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배상금 관련 재판 내용 청와대 교류 △재판 개입 △법관 사찰 △비자금 조성 등 사법농단 의혹 전반에 대한 구조를 짤 수 있었다는 게 앞선 관계자의 설명이다.
임 전 차장 역시 USB에 대한 보도들이 나오자 “내 것이 맞다”고 시인했다. 혐의를 입증할 완벽한 증거를 찾아냈고 항복 선언까지 받아낸 셈이다.
# 피라미드 아닌 점 조직 형태 법원…모래알 조직 면모 드러나
피라미드 형태가 아닌, 재판부가 점조직 형태로 구성된 법원 특유의 조직 문화도 검찰 수사 앞에 무너졌다. 유해용 전 판사 등 증거를 인멸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진술에 협조적이었다는 게 검찰 내 평이다. 무엇보다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않아서 놀랐다’는 게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사건 관계자는 “피라미드 형태의 검찰은 상하 지시와 의리가 중시되는 반면, 점조직 형태의 법원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시켜서 했다’는 진술이 많았다”며 “임 전 차장에게 지시를 받아서 했다는 일관된 진술들이 있고 임 전 차장을 부르기 위해 50명이 넘는 판사들을 불러 USB 안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들에 대해 확인을 했다. 법원은 검찰과 완전히 다른 조직이라는 것을 수사하면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혐의 부인하는 임 전 차장
압수수색 3달여 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임종헌 전 차장. 하지만 임 전 차장은 검찰 조사에서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USB 내 문건이나 부하 법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사실 등은 인정하지만 해당 사안들이 범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몇몇 혐의에 대해서는 “일부는 (밑의) 과잉 충성이었고, 일부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임 전 차장은 검찰의 여러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수사팀 관계자는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전체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겠다는 취지는 아니다”고 브리핑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는 임 전 차장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어 전략이기도 하다. 법원행정처가 재판 관련된 업무를 이유로 검찰의 수사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 앞서 기소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법원에서 어디까지 죄가 인정될지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많다.
검찰은 확인할 게 많은 만큼 천천히 다 물어보겠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앞으로 1~2차례 정도 임 전 차장을 더 조사한 뒤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실제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관계자는 17일 임 전 차장에 대한 조사 진행상황과 관련해 “대략 절반 정도나 거기에 못 미치는 정도”라며 “두 차례 조사가 진행됐음에도 임 전 차장을 둘러싼 의혹이 방대한 만큼 혐의를 특정하기 위해선 아직 추가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임 전 차장 진술은 수사 호재?”
그럼에도 검찰은 임 전 차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두 차례 더 조사한 뒤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로 가겠지만 영장은 99.9% 확정된 채로 시작했다는 게 검찰 내 중론이다.
사건 흐름에 밝은 법원 관계자는 “사건 시작부터 임종헌 전 차장은 구속,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불구속 기소라는 얘기가 파다했다”며 “본인 진술까지 혐의를 부인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검찰 입장에서는 영장을 청구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시받은 대로 했다”는 임 전 차장의 진술도 수사팀 입장에서는 좋은 영장 청구 명분이자 수사 확대 명분이 된다.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 증거 인멸 등의 우려가 생기기 때문.
또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차한성·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등 대법원 ‘윗선’에 대한 수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들의 지시를 받은 게 바로 임 전 차장이라는 점도 혐의를 부인하는 피의자에 대한 영장 청구 이유가 된다. 임 전 차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진술한 맥락들에 대해서는 전 대법원장, 대법관들을 상대로 물어볼 수 있는 게 많이 생긴 셈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앞선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핵심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판사 개별마다 맡은 영역이 다 달라서 하나하나 확인하던 흐름이라면 이제는 그 전체를 총괄하던 임종헌 전 차장까지 수사가 진행된 셈”이라며 “이제 남은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각종 의혹에 개입했는지 책임 여부를 가리는 것만 남았다. 검찰 내에서 수사가 터닝 포인트를 지났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라고 평가했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