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무료 입장’ 둘러싼 현실성 없는 한복 가이드라인 ‘탁상행정’ 논란 부추겨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시민들이 한복을 입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요신문 고성준 기자
서울 종로구는 2013년부터 한복 착용자에 한해 무료로 고궁을 출입할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종로구청은 퓨전 한복이나 개량한복에 대해서는 혜택을 제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무분별한 한복의 개량이 우리 한복의 얼과 멋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외국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국회가 종로구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지난 16일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정감사장에 퓨전 한복을 입고 나타나 문화재청장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동안 잠잠했던 한복 논쟁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시민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일요신문i’는 직접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찾았습니다.
17일 오전 11시 경복궁 앞 한복 대여점은 이미 외국인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한복을 입어보고 싶다고 하자 외국인 직원이 다가왔습니다. 한국어 발음이 조금 어눌한 직원은 “전통과 퓨전 중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먼저 온 손님들은 전통 한복이 진열된 코너와 퓨전 한복이 진열된 코너를 넘나들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모두 퓨전이었고, 전통 한복을 고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여 업체 직원은 “외국인들도 전통과 퓨전의 차이를 알고 있다. 가격이 다른데 어떻게 모르겠나”며 “그래도 8대 2의 비율로 퓨전 한복이 더 많이 나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여점에 머무른 2시간 동안 전통 한복을 빌려간 사람은 지정된 상품 변경이 불가한 단체 관광객 5명뿐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전통 한복을 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복 대여점의 전통 한복 코너. 최희주 인턴기자
기자가 전통 한복과 퓨전 한복을 입어본 결과 두 한복의 착용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현재 대여점에 구비된 한복은 모두 입기 편하도록 개량된 옷입니다. 따라서 빌린 전통 한복만으로는 앞서 종로구가 말한 우리 한복의 가치와 멋을 느끼기 힘듭니다. 문제는 경복궁 한복 착용자 대부분이 빌린 한복을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착용감이라면 사진 찍기 좋은 퓨전 한복을 선호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1시. 위에는 전통 한복을, 아래에는 퓨전 한복을 갖춰 입고 경복궁에 도착했습니다. 궁궐 안에는 ‘물 반 고기 반’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한복을 입은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한껏 부푼 치마, 졸라 맨 허리 리본 등 대부분 대여한 것으로 자기 한복을 입고 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퓨전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걷는 시민들. 최희주 인턴기자
졸업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여고생 무리는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화려한 것으로 골랐다”며 “놀이 문화에 굳이 전통을 고수할 필요가 있나”라고 되물었습니다.
반면 중년층의 생각은 다릅니다. 청주에서 올라온 한 아무개 씨(50)는 “옷도 하나의 역사다. 고궁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퓨전 한복을 우리 고유의 옷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씨의 동생 A 씨는 “원래 역사는 변하는 거야. 어느 시대 역사를 말하는 거야”라며 맞수를 뒀습니다.
실제로 몇몇 시민들은 “종로구가 말하는 전통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전통 소재를 이용한 것만이 전통 한복”이라는 입장부터 “근대 한복이 전통 한복”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전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종로구청은 전통의 기준을 보이는 것 하나로만 정한 셈입니다.
문화재청의 ‘한복 무료 관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오로지 ‘여미는 깃의 저고리’만 무료입장 조건에 해당합니다. 허리 뒤로 묶는 리본은 제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규정 역시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한복 동호회 회원들과 경복궁을 찾은 A 씨는 “작년에 통일신라 양식의 한복을 입고 무료입장하려다 제지를 당한 적이 있다”며 “삼국시대와 발해의 여성복식을 살펴보면 여밈이 없는 저고리와 포의 형태를 한 옷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규삼
뿐만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도 여밈이 없는 한복이 있었습니다. 장저고리와 사규삼은 맞깃 형태로 여밈이 따로 없습니다. 조선시대 세자빈들이 입었던 원삼은 리본을 허리 뒤로 묶는옷 입니다. A 씨는 “경북궁 직원들이 한복기능사나 연구자도 아니면서 무엇을 근거로 입장을 제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종로구의 새로운 규정에 시민들이 뿔난 이유는 ‘꼰대스러움’ 때문입니다. 퓨전 한복 중에도 옷고름과 깃, 동정 등 전통 한복의 요소를 모두 갖춘 옷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명확한 기준 없이 자신들이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면 한복이 아니라는 가이드라인은 오히려 많은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꼴만 갖추면 전통 한복이 되는 것일까요?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공무원들이 현실성 없는 한복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며 불만을 품은 상인들도 많습니다.
종로구에서 배부한 올바른 한복입기 가이드라인
한복 대여업체를 운영하는 백 아무개씨(40)는 “종로구가 나눠준 지침에 따르면 짧은 치마와 허리 뒤로 묶는 리본은 무료입장 제재 대상이다. 그런데 생활한복은 치마가 짧아도 된다고 하더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며 곤혹스러운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이어 백 씨는 “우리는 허리에 달린 리본 하나 떼고 장사하면 그만”이라며 “그런다고 퓨전 한복이 전통 한복이 되나. 전통 한복은 소재부터 다르다. 우리 가게 있는 전통 한복은 모두 중국산이니 엄밀히 말하면 전통 한복이 아니라 그냥 ‘수수한 한복’일 뿐”이라며 배부된 지침서의 맹점을 꼬집었습니다.
실제로 경복궁 앞 한복 대여점에 진열된 전통 한복들은 대부분 중국산입니다. 종로구의 요구에 맞춰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고자 질 좋은 원단으로 전통 한복을 지으면 옷 한 벌 당 100만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갑니다. 이런 옷을 몇 백 벌 구비하고 시간 당 1만 원에 빌려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좋은 소재와 전통 방식으로 만든 한복은 착용과 관리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조금만 감수한다면 격식을 갖춰야할 곳에 한복만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뽐낼 수 있다”면서도 “한복도 시대의 흐름을 탄다. 지금 유행하는 퓨전 한복은 일회성이 짙은 옷이지 않나. 평생 소장하는 나의 한복 한 벌과 이벤트를 위한 한복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종로구청 문화과 백새별 주무관은 17일 기자와 통화에서 ”한복 가이드라인은 문화재청 소관이다.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종로구 음식점 116곳에서 한복 착용자에게 주던 10% 할인 혜택“이라면서도 ”다만 허리 뒤 리본이 달린 한복 착용자의 무료입장만큼은 확실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종로구의 이번 정책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종로구는 2013년 한복의 일상화를 목표로 무료입장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때와 정반대의 제한 정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덧붙여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한복의 다양성과 대중화를 응원하는 ‘2018 한복 문화 주간’ 행사가 경복궁에서 열립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최희주 인턴기자 perrier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