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항공계에 새로운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여행 마니아의 묵은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해줄 항공사가 등장했다. ‘에어프레미아’다. 수장은 2009년 적자에 시달리던 제주항공을 1년 만에 흑자로 이끈 김종철 대표다. 그가 신규 항공사 에어프레미아를 들고 국토부 문을 두드렸다. 국토교통부는 3월 자본금 300억 원으로 강화했던 면허발급 조건을 150억 원으로 낮춘다고 8일 밝혔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 하늘 길의 또 다른 주인이 나올 예정이다.
중장거리 특화 항공사 에어프레미아의 사업 모델은 간단하다. HSC(Hybrid Service Carrier: 하이브리드항공)를 꿈꾼다. FSC(Full Service Carrier: 대형항공)와 LCC(Low Cost Carrier: 저가항공)의 틈새시장을 노린다는 전략이다. 저가항공이 가지 못하는 중장거리 노선과 대형항공의 공급 부족인 노선을 편성하고 편의를 높여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겠다는 심산이다.
보기 드문 항공분야 스타트업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항공운수업은 대규모 자본을 등에 업은 기업이 지배해 왔다. 고정관념을 깬 에어프레미아의 도전이 항공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종철 에어프레미아 대표가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 HSC는 에어프레미아가 새롭게 만든 개념이다.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나.
“GDP가 3만 달러를 넘으면 중장거리 여행객이 증가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올해부터 GDP 3만 달러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비행시간이 늘어날수록 가격만큼 중요한 게 편안함 아닌가. 기존 항공사로는 중장거리와 편안함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단거리 노선은 국내 저가항공가 대부분 차지해 포화상태지만 중장거리 노선은 상당 부분 외항사가 공급하고 있다. HSC는 바로 이 빈 틈을 채우는 서비스다. 저가항공과 대형항공의 장점만 뽑아 고품질 저가격의 서비스로 승객의 탈 권리를 존중하고자 하는 에어프레미아의 경영철학을 담았다. 합리적인 가격에 중장거리 노선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 고품질과 저가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저가항공 타 본적 있나. 조금 불편하지 않나. 성인 남성은 저가항공에서 다리를 못 뻗는다. 심하면 무릎이 앞 좌석에 닿기도 한다. 에어프레미아는 이 부분을 개선했다. 보통 저가항공의 좌석 너비가 40㎝, 앞뒤 좌석 간격은 73㎝다. 에어프레미아 이코노미석은 앞 좌석 등받이까지의 거리가 저가항공보다 15㎝ 더 넓다. 15㎝는 주먹 두 개나 될 정도인데 쉽게 말하면 창가자리에서 화장실 갈 때 옆 사람에게 비켜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나온다. 대형항공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보통 대형항공 이코노미석 좌석 너비가 43㎝인데 에어프레미아는 그보다 넓은 45㎝로 설계했다.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도 대형항공 이코노미석보다 7~10㎝ 더 넓다.
-비즈니스석도 있나
“비즈니스석 대신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일등석을 줄이고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을 확대하는 추세다. 아시아나항공, 에어프랑스, 에어캐나다, 델타항공 등의 세계적인 항공사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좌석 앞뒤 간격만 99㎝로 넓히고 너비는 기존 이코노미석과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에어프레미아는 현존하는 프리미엄 이코노미석 중 가장 넓은 좌석을 제공한다. 107㎝의 넉넉한 좌석 앞뒤 간격은 물론 좌석 너비도 50㎝로 늘렸다. 프리미엄 이코노미는 앞뒤 공간이 좀 나오다 보니 사람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각 108도도 구현할 수 있다. 참고로 대한항공의 비즈니스석이 너비 51㎝에 앞뒤 간격 111~130㎝이다. 이렇게 보면 거의 비즈니스 급 아닌가.”
-가격은 어떤가.
“군더더기를 모두 뺐다. 에어프레미아 이코노미석은 대형항공 이코노미석보다 20%가량 싸다.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은 대형항공 비즈니스석의 반값으로 책정할 예정이다. 가령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샌프란시스코행 비즈니스석이 400만 원 정도라면 에어프레미아의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은 200만 원이 된다.”
─ 그렇다면 단거리 없이 중장거리만 취항하나.
“취항 초반에는 정부규정과 요건 충족을 위해서라도 단거리를 운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3년~4년 안에 사업이 안정되면 중장거리에 집중하려 한다. 중장거리는 통상 5시간 이상 노선을 말하는데 미주 서부와 유럽, 오세아니아 등을 말한다. 재외동포를 포함한 유학생, 경유에 경유를 거듭해야 했던 여행 마니아, 그리고 은퇴한 베이비 부머 세대를 우리의 주 고객으로 예상한다. 외국 방문이 잦은 사업자들도 우리의 주요 타깃이다.“
─ 그렇다면 면허 취득이 관건이겠다. 경쟁사 에어로K나 플라이강원 등은 이미 면허 신청 전력이 있다. 면허 취득에 대해 얼마나 낙관하나.
“저가항공은 우리의 경쟁 대상이 아니다. 기존 항공사와의 직접 경쟁도 우리 입장에서도 좋지 않다. 다른 항공사들이 취항하지 않았던 혹은 하지 못했던 신규노선 개척에 집중하고 있다. 에어프레미아가 취항하게 되면 중장거리국내 여행객뿐만 아니라 한국으로 들어오는 국외 방문객 수요도 증가한다. 기반 공항인 인천공항의 환승, 환적 수요도 함께 증가시켜 인천공항의 허브화 전략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도 우리의 경쟁력이다.”
─ 국내 면허 취득 후 미주 취항에 대해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사업 준비 초반부터 LA 공항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LA 현지 교민들의 직항 요청 민원이 워낙 많다 보니 공항 쪽에서도 노선확대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는 듯하다. LA 공항은 ‘면허 승인만 받으면 언제든 게이트를 내줄 수 있다‘고 했다.”
─ 제주항공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시킨 경영자의 스타트업 도전이다. 에어프레미아 설립은 언제부터 계획했나.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항공의 대표로 지냈다. 사외이사부터 시작해 운 좋게 대표 자리에 앉게 됐다. 적자를 거듭하는 회사라 인수하겠다는 기업도 없었다. 회사는 어려워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죽이 잘 맞았다. 회의시간이면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흑자 전환에 큰 역할을 했던 단일 기종•단일 클래스 전략도 그때 나왔다. 내심 중장거리 노선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2011년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고 나서야 처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꺼내기가 무섭게 ‘공학도는 항공사업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나 역시 당시 제주항공 사정으로는 단거리•장거리 동시 취항은 힘들다고 판단했다. 대표직에서 내려온 뒤 2015년부터 카이스트에서 강의를 했다. 역시 청년과 함께 있으니 좋은 기운을 많이 받더라. 다시 도전하고 싶어졌다. 여전히 중장거리 전문 항공사는 없었다. 제주항공에서 함께 일하며 경험과 신념을 공유했던 멤버들을 모아 2017년 본격적으로 에어프레미아 사업구상에 들어갔다.”
─ 스타트업 기업인데 빠른 속도로 투자금 모집을 마쳤다. 현재 재정 기반은 어떤가.
“항공 분야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최근 혁신에 투자하는 돈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큰돈을 가진 정부나 재벌만 기간산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아이디어와 최적의 비즈니스 모델만 갖고 있으면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PEF: Private Equity Fund)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
패스트트랙아시아의 투자 전문자회사 패스트인베스트먼트가 105억 원을 투자했다. 장덕수 DS자산운용 회장, 휴젤 창업자 홍성범 원장, 그리고 LA 한인상공회의소와 교민도 공동투자자로 나서 주셨다. 초기 목표 금액 300억 원을 채우고도 70억 원이 더 들어와 총 370억 원으로 1차 펀딩을 마감했다. 계속해서 투자 지원금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면허 심사가 끝나는 내년에는 투자금이 약 700억 원에서 1000억 원쯤 마련될 것으로 예상한다. 에어프레미아의 혁신성과 소비자 중심의 비전이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김종철 대표. 사진=박정훈 기자
─ 신생 항공사가 장거리 취항을 한다는 것에 걱정의 시선도 많다. 설비나 안전 시스템은 어떤가.
“항공안전은 항공사의 규모나 연식에 좌우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세계적으로 발생한 항공사고를 보면 대부분 20년~25년이 넘은 노후 항공기의 기체 결함 때문이었다. 에어프레미아는 보잉 787-9이나 에어버스 330-네오와 같은 최신 중형 항공기를 도입한다. 여기에 항공기 리스사인 에어버스와 보잉가 설비 관련 훈련 프로그램인 ‘글로벌 항공기 관리시스템’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쉽게 말해 자동차 리스사에서 자동차를 정기적으로 관리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빅데이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면 세계 언제 어디서나 신속하게 점검이 가능하고 지연 운항에 따른 소비자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다. 비용은 조금 더 들 수 있지만 안전이 먼저, 사람이 먼저 아니겠나.”
─ 에어프레미아 출범 소식이 보도되자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에 칭찬과 격려의 글이 올라왔다. ‘에어프레미아 채용’도 인기 검색어였다. 앞으로의 채용계획은?
“블라인드에는 안 좋은 글만 올라오는 줄 알았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팀워크다. 제주항공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 고객이 중요한 만큼 내 직원도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비행기 한 대에 승무원과 기장을 포함해 인력 12명이 투입된다. 에어프레미아는 18명 투입을 기본으로 한다.
일하는 사람이 힘들면 좋은 서비스가 나올 수 없지 않나. 채용도 최대한 많이 할 계획이다. 보통 항공기 1대당 직접 고용효과가 약 100명, 간접고용 효과는 수백 명이다. 만약 3년 내 항공기 7대 목표를 달성한다면 승무원, 파일럿, 등 직접 고용 인원만 1000명에 달할 것이다. 간접고용 인원은 그 몇 배가 넘지 않겠나.”
─ 에어프레미아가 국내 항공업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옛날 얘기를 하긴 쑥스럽지만 내가 여행 산업의 판을 바꿨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제주항공이 성공한 뒤로 많은 저가항공이 출범했으니까. 그게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항공업계도 만만치 않은 고인물이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여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않겠나. IT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화물서비스 등 새로운 산업들이 많이 생길 것이고 준비하고 있다. 에어프레미아의 등장이 시장에는 건강한 긴장을, 청년에게는 양질의 알자리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각에선 에어프레미아의 면허 취득 여부에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을 보낸다. 기존 항공업계가 이미 포화상태인데다 국토부가 이들의 밥그릇 싸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과당 경쟁 우려에 대해 김종철 대표는 “HSC는 국내 대형항공과 저가항공의 틈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진정한 경쟁대상은 외항사”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저가항공과 함께 국내 항공시장은 크게 성장했지만 중장거리 노선 공급의 경우 꾸준히 외항사의 몫이었다. 이 때문에 싼 가격에 유럽이나 미국을 가고 싶은 여행객은 외항사를 타거나 잦은 경유를 해야만 했다. 김 대표는 “탕수육도 대(大)자와 소(小)자만 있는 것보다 중(中)자도 있는 것이 손님들이 더 좋아한다”며 “더 많은 탑승객이 고품질-저가격의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희주 인턴기자 perrier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