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 기레기 테러당할 땐 관객들 열광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망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던 카슈끄지는 이날 총영사관에 들어간 후 자취를 감췄고, 같은 날 비행기를 타고 입국한 사우디아라비아인 정보요원 등에 의해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후 사우디 정부는 카슈끄지가 사망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암살을 지시했다는 의혹은 부인했다.
영화 ‘펄프픽션’ 포스터
# 왜 ‘펄프픽션’ 같다고 했을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1994년작인 ‘펄프픽션’은 그 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건달인 빈센트(존 트라볼타 분)와 쥴스(사무엘 잭슨 분)는 두목의 금 가방을 찾기 위해 어떤 이들을 찾아가 처단한다. 이후 두목의 명령을 어긴 복서 부치(브루스 윌리스 분)를 죽이기 위해 찾아가지만 오히려 부치에게 한방 먹고 만다. 이 과정에서 두목은 또 다른 이들에게 납치돼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펄프픽션’은 이렇듯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하나의 틀 안에 담긴 독특한 구조를 가진 영화다. 납치가 소재로 등장하지만 ‘언론인 납치 및 암살 사건’인 카슈끄지와 사례와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여기서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펄프 픽션’은 ‘3류 소설’이라는 의미다. 결국 뉴욕타임스가 “영화 ‘펄프픽션’ 같았다”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의 내용과 실제 사건의 개요가 같다기보다는 3류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거장이라 불리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3류 소설’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그 내용과 구성만큼은 치밀하게 연출해 이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았다. 이 영화 속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결국은 하나로 엮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슈끄지의 사건 역시 개별적으로 벌어진 것 같은 여러가지 상황들이 결국은 하나로 모여 거대한 음모로 변했다는 의미에서 “‘펄프픽션’ 같았다”는 평가가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 실제 언론인 납치 및 살해를 다룬 영화는?
이번 사례처럼 언론인 납치 및 살해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일단 언론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영화팬들은 이 사건을 보며 기시감을 느낄 수도 있다. 얼마 전 개봉된 영화 속에서 언론인 납치 사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영화 ‘협상’ 홍보 스틸 컷
바로 배우 현빈, 손예진 주연작인 ‘협상’이 그것. 이 영화는 국제적인 테러범인 민태구(현빈 분)와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경찰 협상가 하채윤(손예진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극 중 민태구는 자신의 정보를 캐기 위해 태국에 온 신문기자를 납치·감금한 뒤 하채윤을 압박한다. 결국 민태구는 이 신문기자가 일하고 있는 신문사의 대표까지 협상석으로 끌어들여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간다. 또한 민태구는 이 신문기자에 이어 하채윤의 상관인 경찰 간부까지 납치하며 영화적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할리우드로 고개를 돌리면, 배우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영화 ‘본 시리즈’의 3편인 ‘본 얼티메이텀’(2007)에 중요한 정보를 가진 기자 사이먼 로스가 등장한다. 본(맷 데이먼 분)은 영국의 기차역에서 로스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본을 쫓으며 로스를 감청하던 CIA는 기차역으로 암살요원을 파견한다.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로스는 본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다가 암살요원에게 동선이 포착되고, 결국 저격수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수많은 승객들이 오가는 기차역에서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저격 사건이 발생한다는 설정이었지만, 로스는 이 영화의 단역 수준의 캐릭터였기 때문에 이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 정도로 지나간다.
영화 ‘본 언티메이텀’ 홈보 스틸 컷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례는 또 다른 영화 ‘내부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둔 영화 ‘내부자들’에서는 펜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분)가 등장한다. 그는 “말은 권력이고 힘이야” “끝에 단어 3개만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로”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뭐 하러 개, 돼지들에게 신경 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등 명대사를 쏟아내며 공분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이강희를 형님처럼 모시다가 배신당한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는 결국 그에 대한 대가로 글을 쓰는 이강희의 손을 잘라버린다. 이는 명백한 사적 복수로 범법 행위라 할 수 있지만, ‘내부자들’을 본 관객들은 워낙 이강희에 대한 반감이 큰 터라 오히려 안상구의 행위를 지지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손이 잘린 후 “까짓것 왼손으로 쓰면 되죠”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강희의 한 마디가 더욱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에 군불을 지폈다는 평가가 무게가 실린다.
한 영화 관계자는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극적 사건을 그려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며 “카슈끄지의 사건은 그런 영화 속 문법과 상황들을 모두 뛰어넘을 만한 충격을 준 사건이라 ‘펄프픽션’ 같다는 반응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