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 은행들 ‘미국 재무부 PDF파일’ 내려받아 제재여부 판단
10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적어도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UN 제재를 완화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 마크롱 대통령께서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이 같은 역할을 해 달라”고 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는 무엇보다 평양의 구체적인 공약을 기대하고 있다”며 “그때까지 프랑스는 UN 안보리가 채택한 제재를 계속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대북 제재 완화 요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 역시 미국의 대북 기조에 손을 들어줬다.
만약 프랑스가 대북 제재를 풀겠다는 입장이어도 미국의 찬성을 받지 못하면 대북 제재가 풀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미국 외 UN 안보리 이사국을 설득해도 소용없는 이유는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까닭이다.
UN 안보리 이사국은 상임이사국 5곳과 비상임이사국 10곳으로 이뤄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5개국이 영구 상임이사국이다. 비상임이사국은 임기제로 번갈아 가며 표결을 하는 10개국을 말한다. 상임이사국은 절대 권한을 하나 가지고 있다. 거부권이다. 상임이사국이든 비상임이사국이든 14곳 모두가 찬성해도 상임이사국 가운데 한 곳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의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UN 안보리의 금융 제재 의결 사항은 각 국가로 실제 어떻게 전송될까. UN 안보리에서 결의된 금융 제재 정보는 UN 안보리 보조 기관(Subsidiary Organs) 홈페이지에 즉각 올라온다. 한국은 금융위원회 산하기관인 금융정보분석원에서 UN 안보리 결의안을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금융정보분석원의 공중협박자금조달금지제도 안내 화면에 들어가면 금융거래제한 대상자 목록이 나온다.
금융정보분석원은 UN 안보리에서 지정하는 금융거래 제한 대상 외에도 금융위원회에서 기획재정부, 외교부, 법무부 동의를 받아 자체적 판단에 따른 대상자도 모두 고시한다. 공중 등 협박목적을 위한 자금조달행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 내부의 업무 규정은 촘촘하게 금융거래 제한 대상자를 선정한다. 시중은행은 이 정보를 받아 금융거래 제한 대상자 정보를 은행 전체에 뿌린다.
하지만 UN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를 완화한다고 북한의 금융이 풀리는 건 아니다. 미국이 가진 진정한 힘은 미국 재무부(Department of Treasury)의 PDF 파일에서 나온다. UN 안보리가 대북 제재 완화 무드에 손을 들어줘도 전세계 주요 은행이 미국 재무부의 공지를 항상 주시하는 까닭이다.
미국 재무부 홈페이지.
미국 재무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정책 이슈(Policy Issues)’라는 메뉴가 자리한다. 여기에는 테러리즘과 불법 금융(Terrorism and Illicit Finance)이라는 세부 항목이 마련돼 있다. 이란과 북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쿠바, 시리아 등이 올라와 있다.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대북 제재 안내 책자
전세계 주요 은행은 미국 재무부가 PDF 파일로 된 제재 명단을 올리기만 하면 이 공지에 따라 특정 국가와 인물을 금융거래 제한 대상으로 지정한다. 한국의 시중은행 역시 금융정보분석원이 공지하는 제재 정보 외에 미국 재무부의 공지도 수시로 파악하고 업무에 적용한다고 알려졌다. 실물 경제에서 이 PDF 파일 한 개가 실제 대북 제재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시중은행이 미국 재무부가 올리는 PDF 파일 한 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기축 통화의 힘이기도 하다. 특정 국가나 은행이 달러 거래 제재가 걸리면 은행은 달러로 된 모든 거래를 시행할 수 없다. 무역 금융의 대부분은 달러로 이뤄진다.
물론 유로나 엔화로 거래해도 무방하다. 미얀마가 독재 등의 문제로 미국의 금융 제재를 받았을 때인 2010년대 초반 미얀마에서 상제품을 제조하던 한국업체는 유로와 엔화로 물품 대금을 지급 받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은행과 은행을 연결해주는 대형 국제은행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송금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규모를 인정 받는 은행은 전세계에 지점을 두고 각 국가 은행끼리의 금융 거래를 터주는 연결 은행(Through Bank) 역할도 한다. 전세계에서 은행 순위 상위권을 점거한 곳은 JP모간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씨티, 골드만삭스, 모간스탠리 등이다. 다 미국계 은행이다. 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은행 대부분이 미국 재무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셈이다.
게다가 세컨더리 보이콧이라 불리는 2차 금융 제재가 발효되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1차 금융 제재가 가해져 직접적인 금융 거래가 막힌 국가는 미국의 영향력이 적은 제3국에 법인을 세우면 금융 거래의 숨통은 튼다. 허나 2차 금융 제재가 가해지면 제3국을 거친 송금조차 어렵다. 무역 신용장 거래 시 반드시 적어야 하는 수출항구까지 미국 재무부가 제재를 가하는 까닭이다.
수출업체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수출항구를 넓게 적는 식으로 미국 재무부의 눈을 피하는 ‘꼼수’도 썼다. 미얀마의 수출입 창구 양곤 항구(Yangon Port)를 아시아 항구(Asian Port)라고 적거나 이란의 수출입 창구 반다르 아바스 항구(Bandar Abbas Port)를 페르시안 항구(Persian Port)로 적는 식이었다. 허나 최근 주요 은행은 정확한 항구를 적지 않으면 신용장 거래도 막고 있다고 알려졌다.
결국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모두 의결한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은 결국 미국이다. 미국을 설득하는 길이 대북 제재를 푸는 데 유일한 창구인 셈이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