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이 화내다 불리할 땐 애걸복걸…재떨이로 술 권하기 기싸움 벌인 후 더 친해지기도
지난 남북정상회담 만찬장. (오른쪽 두 번째부터 왼쪽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손경식 한국경총 회장이 리선권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과 냉면을 먹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또 리선권 위원장은 회담에 지각한 조명균 통일부 장관에게 ‘시계가 주인을 닮아 (시간) 관념이 없다’거나 ‘(김태년 의원을 지칭해) 배 나온 사람한테 예산을 맡기면 안 된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 우리 측 인사들은 리선권의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도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보수진영에서는 리선권 발언에 항의하는 뜻으로 이른바 ‘목구멍 챌린지(냉면을 먹고 인증 영상을 올리는 방식)’까지 유행하고 있다. 이처럼 야당이 굴욕외교라며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예법과 문화가 다르다”며 진화에 나섰다. 진실은 무엇일까. 역대 남북회담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봤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정국교 전 민주당 의원은 북한 인사와 재떨이에 술을 나눠 마신 경험담을 공개했다. 정 전 의원은 “북한 고려호텔에서 환담을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차관급 인사인 최승철 대남전선부 부부장이 장관급인 남측 인사를 맞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앉았다. 북한 의전에 정통한 남측 인사에게 저자는 왜 저리 싸가지가 없느냐 물었더니 원래 북한 인사들은 남측 인사와 만나면 오버를 하며 위세를 부린다고 하더라”면서 “무례에 보복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공식만찬에서 최승철에게 재떨이를 내밀며 한잔 하자고 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기겁했지만 결국 재떨이로 한 잔씩 마시고 더 친해졌다. 무조건 저자세로 나간다고 회담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물론 담뱃재가 들어있던 재떨이는 아니고 새 재떨이였다”면서 “또 한번은 최승철이 만찬회에 우리를 초대하고 30분이나 늦게 왔다. 내가 우리나라에는 ‘후래자 3배(늦게 도착한 사람이 술 3잔을 마시는 것)’ 문화가 있다고 하니까 자기도 안다고 하더라. 그래서 술 3잔을 먹이고 만찬을 시작하기도 했다. 회담 내내 기 싸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리선권이 ‘냉면 목구멍’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제가 겪어보니까 그걸로 충성심을 나타내려는 것 같더라. 협상 파트너 기를 죽여서 자신과 수령의 위상을 올리려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의원은 “북한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우리를 아래로 보려는 행동은 겪어봤는데 리선권같이 말을 거칠게 하는 것은 겪어보지 못했다”면서 “(북한의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만나봤는데 굉장히 점잖더라. (리선권 사례는) 특이한 케이스”라고 우려했다.
정 전 의원은 “외교는 말로 싸우는 전쟁인데 기에 눌리면 어떻게 싸우나. 기가 죽은 상태에서 협상을 하면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판 깰 수 있다고 해야 한다. 당당하게 임해야 좋은 협상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 최초의 밀사로 북한을 방문해 첫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김경재 전 의원은 리선권 사례는 일반적인 북한 문화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김 전 의원은 “나는 (방북했을 때 기 싸움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민망하고 과분할 정도로 잘해줬다. 한번은 밥을 먹는데 당시 북한 인민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줄 정도로 너무 잘해줘서 나한테 뭘 요구하려고 이러는지 오히려 경계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면 무지하게 잘한다. 반대로 함부로 하는 것도 전술전략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의원은 “나는 북한과 협상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선권의 발언들은 우리가 참아야 하는 한계를 벗어났다”면서 “리선권의 발언은 문재인 정부의 대응 수위를 측정해보려는 일종의 테스트라고 본다. 우발적인 발언이 아니고 계획적인 발언이라고 본다. 이런 부분까지 항의하지 않고 넘어가면 남북대화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국민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라도 문제제기를 해서 사과를 받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과한 요구를 해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통일부 고위인사는 “리선권은 군부 출신인데 군부 출신이 원래 거칠긴 하다”면서도 “(지속적인 모욕발언은) 협상전술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과거 모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평양에 갔는데 협상이 잘 안 되니까 북한 인사가 총재에게 ‘당신 이렇게 하면 서울 못 돌아간다’고 협박했다. 총재가 그 발언을 듣고 상당히 부담을 느끼더라. 북한은 공갈 협박하는 데는 원래 선수”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라고 모욕을 주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방식은 공산주의자들이 기본적으로 하는 수법”이라며 “괜히 회담에 지장이 생길까봐 참고 넘어가는 거 같은데 대응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게 더 협상에 유리하다. 북한은 자기들이 필요하니까 회담하는 거다. 우리가 거기에 맞대응한다고 회담이 결렬되지는 않는다”고 조언했다.
이 인사는 “냉면 발언 자체가 있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그런 발언이 실제 있었다면 우리 측이 문제를 지적했어야 한다고 본다. 외교관끼리야 대꾸할 가치도 없는 발언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재벌총수는 국가가 지켜줘야 하는 일반 국민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 2009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20년가량 남북군사회담에 참여했던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북한 사람들 말투가 원래 투박하고 리선권이 다혈질인 것은 맞지만 투박하게 말하는 것과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다르다. 그건(냉면 목구멍 발언) 북한에서도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이다.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발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문 센터장은 “리선권과 직접 대화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회담장에서 자주 만나봤다. 북한은 천의 얼굴을 가진 집단이다. 협상을 하면서 막말을 하기도 하지만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사정할 때도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북한의 협상술”이라고 말했다.
문 센터장은 “김영철(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나를 어려워했다. 엉뚱한 속임수를 쓸 때마다 근거를 들이대며 ‘이런 자료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할 거야?’라고 정확히 짚어주면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맸다”면서 “외교도 사람 간 관계와 똑같다. 한 사람이 늘 끌려다니면 그게 좋은 관계인가. 서로 존중해줄 때 좋은 관계가 된다”고 말했다.
문 센터장은 “북한이 막말을 한다고 우리도 똑같이 모욕적인 발언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잘못된 발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상대방이 불쾌해 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할 말도 못하면 안 된다”면서 “잘못된 것을 우리가 지적했다고 남북화해 분위기가 깨진다면 애초에 진정성이 없었던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