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너무 친한 주장’ ‘과하게 전투적인 주장’ 선수들이 꺼려…최악은 ‘자기밖에 모르는 주장’
메이저리그 명문구단 보스턴에서 주장을 맡았던 포수 제이슨 배리텍은 자신의 유니폼에 새겨진 C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장이란 모든 선수들이 하나가 돼 경기를 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창구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뜻에서다.
배리텍의 해석은 현대 야구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주장의 역할을 대변한다. 한 코치는 “요즘 프로야구단에는 사실상 두 명의 감독이 있다고 보면 된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진짜 감독과 그라운드 밖에서 선수들을 아우르는 라커룸의 감독(주장)이다”라며 “팀 컬러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만큼 선수단 내에서 주장의 역할과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고 했다. ‘소통’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시대라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주장의 임무도 예전보다 더 막중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 김현수·손아섭·나성범, 새 캡틴이 된 간판 타자들
올겨울에는 LG 김현수, 롯데 손아섭, NC 나성범처럼 팀을 대표하는 간판타자들이 새 주장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셋은 모두 감독이 직접 정한 캡틴들이다. 한때는 반장선거처럼 선수단 투표를 통해 주장을 선출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김기태 KIA 감독은 LG 사령탑 시절 선수들은 물론 프런트와 코칭스태프까지 투표에 참여해 주장을 뽑는 파격적인 방식을 취한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주장 선택을 감독에게 일임하는 분위기다. 감독이 생각하는 적임자와 선수들이 추천하는 인물에 큰 차이가 없어서다.
LG트윈스는 잠실야구장에서 실시한 선수단 전체 미팅에서 김현수를 신임 주장으로 선임했다. 사진 출처 = LG트윈스 홈페이지
김현수는 류중일 LG 감독이 뽑은 새 주장이다. 전임 주장인 베테랑 박용택에게 완장을 물려받게 됐다. 류 감독이 선수단 전체 미팅에서 코치들과 선수들의 동의를 구해 김현수를 주장에 앉혔다. LG와 한 지붕 라이벌인 두산에서 오랜 시간 간판선수로 활약했던 김현수는 이적 1년 만에 새 소속팀 선수단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다. FA 이적 첫해인 올해 117경기에서 타율 0.362 20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면서 ‘모범 FA’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2008년 이후 10년 만에 타격왕에 오르는 기염도 토했다. 그는 “주장으로 뽑혀서 기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다. 어려운 자리지만 우리 선수들을 믿고 모두 함께 잘해나가겠다”며 “믿고 맡겨 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양상문 감독 체제로 새 출발하는 롯데는 외야수 손아섭을 새 주장으로 임명했다. 올해까지 2년 동안 주장을 맡았던 이대호가 양 감독에게 “내년부터는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주장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양 감독은 공식 취임식에서 이 소식을 전한 뒤 곧바로 새 주장 손아섭을 소개했다. 손아섭도 주장 자격이 충분하다. 2007년 롯데에 입단한 뒤 줄곧 자이언츠 유니폼만 입었고, 지난 시즌을 끝으로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은 뒤 4년 총액 98억 원에 사인해 롯데에 남았다. 팀 내부는 물론 리그 전체에서도 근성과 투지의 상징으로 꼽히는 선수다. 양 감독 역시 “손아섭은 우리 팀 내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투지가 넘치는 선수”라며 “그런 면에서 손아섭이 주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흔쾌히 주장을 맡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또 “손아섭이 내년에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모든 선수가 도와달라”고 당부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말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NC는 이동욱 신임 감독이 직접 선택한 나성범을 새 주장으로 발표했다. 나성범은 NC가 1군에 진입한 2013년부터 줄곧 팀의 얼굴로 활약한 선수다. 구단 최초 골든글러브 수상과 최초 20홈런-20도루 클럽 가입을 비롯해 NC의 역사를 차례로 써내려가고 있다. 올 시즌 팀이 최하위로 처진 가운데서도 타율 0.318 23홈런 91타점 110득점으로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그동안 NC 주장 자리는 30대 중후반 베테랑 타자들의 몫이었다. 내년에 30세가 되는 나성범이 팀 역대 최연소 주장이다. 나성범은 “올해는 개인으로서도, 팀으로서도 모두 아쉬운 한 해였다. 내년에 주장 역할을 잘해 꼭 다시 포스트시즌에 오르고 싶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 다만 NC 팬들은 “그동안 주장 자리를 거쳐 간 이호준, 이종욱, 박석민, 손시헌이 모두 캡틴을 맡은 시즌에 성적이 뚝 떨어졌다”는 징크스를 언급하면서 걱정을 내비치고 있다. 심지어 올해 초 주장이던 손시헌은 개막 직후 타석에서 헤드샷을 맞고 쓰러지는 불운까지 겪었고, 결국 시즌 중반인 6월에 주장 자리를 다시 박석민에게 넘기기도 했다. 프로 사령탑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이 감독으로선 나성범이 그 징크스마저 털어내고 맹활약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NC는 이동욱 신임 감독이 직접 선택한 나성범을 새 주장으로 발표했다.
야구단은 ‘프로’ 선수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름값 높고 몸값 높은 스타 선수들 사이에서 주장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성적이 뒷받침돼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김현수, 손아섭, 나성범이 새 주장으로 선택된 첫 번째 이유도 이들이 ‘야구를 잘하는 선수’라서다. 성적에 따라 수천만 원도 아닌 수억, 수십억 원의 몸값 격차가 생기는 상황에서 ‘야구 못하는 선배’의 말은 야구 잘하는 후배들에게 권위를 잃는다.
무엇보다 주장은 최소한 시즌 내내 1군에 머무를 수 있는 선수여야 한다. 주장이 성적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다면, 1군에서 또 다른 ‘임시 주장’을 찾아 리더 역할을 맡겨야 하는 혼란이 생긴다. 주장이 안정적으로 주전 자리를 지키면서 성적으로도 모범을 보이는 게 최선의 결과인 셈이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은 주장들의 부담감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주장 역할을 하다 은퇴했던 한 야구 관계자는 “마지막으로 주장을 맡았던 해에는 솔직히 아픈 데가 너무 많아서 일찍 시즌을 접고 싶었다. 그러나 주장이 최소한의 성적은 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주장은 경기 전과 후는 물론 비시즌에도 할 일이 많다. 코칭스태프와 구단에 선수단 내부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총회에 대표로 참석해야 한다. 크고 작은 선수단 내부의 문제들도 앞장서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주장의 역할이 더 커진다. 이런 이유로 각 구단은 주장에게 매월 판공비를 지급한다. 팀마다 다르지만 대략 50만~100만 원 정도다. 수석코치가 받는 품위유지비와 비슷한 수준이다.
주장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다. ‘전달자’ 역할만 시키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그라운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의 전권을 맡기는 감독도 있다. 전자는 주로 베테랑 감독들, 후자는 주로 젊은 감독들이다. 감독과 주장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선수단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과거 한 구단은 똑같은 선수가 2년 동안 주장을 맡았지만, 두 시즌의 라커룸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주장의 성과에 대한 평가도 1년 사이 극과 극을 오갔다. 두 시즌의 감독이 달랐던 까닭이다. 이 구단 관계자는 “감독과 주장의 호흡이 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분위기가 결국 팀 성적으로 직결되기도 한다”며 “주장을 잘 뽑고 그 주장과 ‘밀고 당기기’를 잘 하는 것도 감독의 능력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 주장의 역할, ‘소통’이 전부는 아니다
‘소통의 시대’가 찾아온 뒤로 주장이 갖춰야 할 덕목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한 구단 관계자는 “예전 주장들은 후배들에게 큰소리도 치면서 선수단을 강하게 통솔하는 장악력이 꼭 필요했다. 당연히 주장 자리는 카리스마 있는 고참 선수들의 몫이었다”며 “지금 주장의 역할은 리더십보다 선수들의 크고 작은 의견과 요구를 구단과 코칭스태프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 그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얼마나 잘 조율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포지션인 투수나 성적 향상에 집중해야 하는 예비 FA는 주장으로 뽑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점점 깨지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선수들이 가장 꺼리는 주장은 오히려 ‘구단이나 감독과 너무 가까운 주장’이다. A 선수는 “구단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주장들은 아무래도 팀에 선수단 내부의 고충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며 “팀 성적이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선수단 내부에서도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구단이나 감독의 의견을 듣고 와서 그대로 선수단에 전달만 하는 주장들은 믿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전투적’인 주장도 좋은 모델은 아니다. 이 선수는 “주장은 소통을 하는 사람이다. 주장이 그 선을 넘어 구단과 선수단 사이에서 화해를 시키려고 싸우다 도리어 감독과 더 멀어지는 경우도 생긴다”고 했다. B 선수 역시 “반대로 선수들에게 주의를 주고 꾸짖는 게 주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다가 팀 내 불화만 더 생겼던 일도 많다”고 귀띔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최악은 ‘자기밖에 모르는 주장’이다. B 선수는 “주장을 팀의 간판스타가 쓰는 감투로 생각하고, 주장이 된 후에도 평소처럼 자기 야구에만 신경을 쓰는 선수들을 몇몇 봤다”며 “좋은 주장들은 경기가 끝난 뒤 연봉이 적은 선수들에게 밥을 사주고 어려움을 들어주면서 격려해준다. 사실 진짜 주장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선수들”이라고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지터는 양키스 아닌 빅리그 전체의 캡틴” 남다른 양키스·요미우리 주장 뉴욕 양키스는 세계 최고의 리그인 메이저리그에서 월드시리즈 역대 최다 우승(27회)을 기록한 명문 구단이다. 수많은 야구선수들이 양키스의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동경한다. 그렇다면 그런 양키스의 현재 주장은 누구일까. 답은 ‘없음’이다. 양키스의 주장 자리는 2015년부터 4년째 공석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새 주장을 선임할 계획은 없다. “양키스 라커룸의 리더십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양키스 캡틴은 아무 선수나 맡을 수 없는 영예”라는 구단의 소신 때문이다. 양키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주장을 맡았던 선수는 ‘영원한 캡틴’으로 통하는 데릭 지터다. 양키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주장을 맡았던 선수는 ‘영원한 캡틴’으로 통하는 데릭 지터다. 지터는 매팅리 감독이 주장직을 내려놓은 뒤 8년이 지난 2003년 6월 양키스의 16번째 캡틴으로 선임됐다. 이후 2014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11년간 주장 자리를 지켰다. 야구 실력도 물론 뛰어났지만, 양키스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모든 선수에게 모범이 된 지터의 태도와 인성을 더 높이 샀다. 지터가 평범한 내야 땅볼을 치고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장면은 다른 구단 신인 선수 교육 때 영상 자료로 활용됐다. 현역 최고 외야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브라이스 하퍼는 “지터는 양키스의 주장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의 주장이었다”는 찬사도 내놓았다. 이런 지터의 후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브라이언 캐시먼 양키스 단장은 심지어 “지터가 양키스의 마지막 주장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메이저리그에 양키스가 있다면, 일본에는 요미우리가 있다. 요미우리 주장 완장 역시 양키스의 캡틴 자리만큼이나 손에 넣기 어려운 명예다. 1934년 창단 이후 지금까지 ‘교진(巨人)의 주장’을 경험한 선수는 총 19명뿐이다. 현재 주장은 1988년생인 사카모토 하야토다. 8년간 주장을 맡았던 아베 신노스케가 2014년을 끝으로 물러나면서 당시 26세였던 주전 유격수 사카모토가 역대 최연소이자 19대 주장 자리에 올랐다. 일본 야구계를 들썩이게 한 ‘사건’이었다. 사카모토는 이듬해인 2015년 프리미어12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가 대만 시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현지 여성과 만취한 모습이 포착돼 1년 만에 주장직을 박탈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평소 선수의 사생활과 품위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는 요미우리가 주장의 이런 실수를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뜻밖의 방식으로 명예를 지켰다. 그해 구단 사상 최연소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고도 “19세부터 주전으로 뛰게 해준 팀을 떠날 생각은 애초에 해보지 않았다”며 FA 권리 행사를 포기했다. 그렇게 그는 요미우리의 주장으로 남았고, 올해 초엔 2020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야구대표팀 주장으로도 일찌감치 낙점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