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실세 첩보 뭉갠 의혹도 삐죽…청와대 “일방적 주장” 일축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12월 19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김태우 씨가 작성한 첩보 목록을 공개했다. 한글 파일 형태의 문서는 작성일, 작성자 이름(김태우), 제목으로 이뤄져 있었다. 나 원내대표는 그 출처를 밝히진 않았지만 자유한국당 내부에선 김 씨가 평소 알고 지낸 한국당 관계자에게 전한 것이란 얘기가 파다했다. 나 원내대표는 100건이 넘는 문서 중 11건에서 민간인 불법사찰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날짜순으로 정리한 그 문서 제목이다.
▲코리아나 호텔 배우자 이 아무개 씨 자살 관련 동향 ▲한국자산관리공사 비상임이사 송 아무개 씨, 홍준표 대선자금 모금 시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 비위 관련 첩보성 동향 ▲방통위 고 아무개 상임위원, 김현미 국토부 장관과 갈등 ▲주 러시아 대사 내정자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 금품수수 관련 동향 ▲고건 전 총리 장남 고 아무개 씨 비트코인 사업 활동 ▲박근혜 친분 사업자, 부정사업 통한 공공기관 예산 수령 ▲조선일보, BH(청와대)의 홍 아무개 회장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검토 여부 취재 중 ▲조선일보, 유 아무개 의원 재판거래 혐의 ▲MB정부, 방통위 황금주파수 경매 관련 SK 측에 8000억 특혜 제공 ▲진보교수 전 아무개 씨, 사감으로 VIP 비난
논란이 커지자 김 씨 직속상관이었던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기자간담회를 자청, 자유한국당이 불법사찰로 주장한 11건에 대해 일일이 해명했다. 우선 2017년 7월 만들어진 코리아나 호텔 배우자, 홍준표 대선자금, 최경환 비위 관련 첩보 3개는 “이전에 민간영역(정보)까지 다양하게 수집하던 버릇을 못 고치고 보고했다”면서 “(이인걸) 특감반장이 ‘우리 정부는 이전 정부와 다르다, 앞으로 이런 정보를 수집하지 말라’고 제재했다”고 설명했다.
김현미 우윤근은 합법적인 감찰 대상, 고건 전 총리 아들은 비트코인 정책보고서 작성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근혜 친분 사업자는 공공기관과 관련돼 있어 직무범위에 포함된 업무라는 해명이다. 2018년 7~8월에 생산된 나머지 첩보 4개는 “김태우 수사관이 열심히 일을 안 하던 시기”라며 “조선일보 건은 언론사찰 소지가 있으니 작성하지 말라고 했고, 방통위와 진보교수 전 아무개 씨 첩보는 아예 보고받은 바 없다”고 했다.
청와대는 김 씨를 ‘미꾸라지’ ‘비위 혐의자’로, 그가 생산한 첩보를 ‘불순물’이라며 강한 어조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사정당국 관계자들 반응은 다르다. 특감반 근무 경력의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김 씨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특감반에서 일했던 이 분야 베테랑이다. 김 씨 정도면 정권에서 무슨 첩보를 원하는지 금방 파악한다. 만약, 반부패비서관이나 민정수석이 명확하게 업무 규정을 했다면 이런 종류의 첩보는 애초부터 생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 정권에서 김 씨 활동을 묵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 씨가 청와대에 처음 온 이후 문제가 되는 보고서를 계속 만들었는데 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특감반 출신의 또 다른 사정기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형철 비서관과 특감반장이 김 씨에게 경고를 하고 중단을 시켰는데 왜 사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첩보들이 계속 생산됐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제 와서 불순물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 첩보가 어느 선까지 보고가 됐는지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김 씨가 윗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밉보이면서까지 이런 첩보를 만들 이유가 뭐가 있느냐. 통상 인사에 목숨을 거는 공무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상관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김 씨가 일을 안 하던 시기에 만들었다는 첩보 내용 4개가 현 정권 입장에선 유용할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김 씨가 고과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어떤 첩보를 써야 하는지 알고 그랬을 수 있다.”
청와대는 특감반원에 대한 관리·감독 소홀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고위공직자를 감찰하는 특감반원 활동 특성상 이들에 대한 견제는 필수다. 그러나 이 역할을 하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출신의 한 법조인은 “지금 청와대 해명을 들어보면 첩보를 생산하는 특감반원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첩보 생산을 두고 개인 일탈로 몰아가고 있지 않느냐. 청와대 특감반원 첩보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따라서 그만큼 더 신경을 써서 감시를 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 씨를 두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미꾸라지가 개울물 흐린다”고 했던 것에 대해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특감반 사태는 정국의 화약고가 분명하다. 정치권에선 DJ 정부 시절 ‘옷로비 게이트’ 또는 박근혜 정권의 ‘정윤회 문건’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옷로비 게이트는 특감반 전신인 사직동팀에서, 정윤회 문건은 특감반 박관천이 생산한 첩보 문건으로부터 촉발됐다. 둘 다 정권의 레임덕을 초래했다. 여권 일각에선 보수 정권 특감반에서 일했던 김 씨를 다시 청와대로 데리고 온 문재인 정부 실세가 누구냐를 두고도 설왕설래가 한창인데, 내부 책임론으로 확산될 경우 주류 간 파워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 씨와 함께 근무했던 다른 특감반원들 첩보에 관심이 모아진다. 여기에도 불법 사찰로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있을 경우 청와대와 김 씨 간 벌어지는 진실게임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반부패비서관실이 광범위한 사찰을 벌였다는 데 무게가 실리는 까닭에서다. 이에 대해 현 정권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솔직히 말하면 좀 애매한 면이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싶은데 이러다 보면 경계가 넘을 때가 있다. 국정원이나 검·경의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폐지하다보니 특감반원 업무 범위가 좀 더 넓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법 사찰을 없애기 위해 국정원 등의 정보 수집을 금지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특감반원이 영역을 확대했다는 설명은 모순이다.
일부 언론과 자유한국당은 반부패비서관실에서 원대 복귀한 검경 수사관들을 접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불법사찰 또는 현 정권 인사들에 대한 비위 은폐 등에 대한 제보를 받기 위해서다.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한 명이라도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실제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 몇몇 특감반원들은 현 정권 실세들이 연루된 비리 사건에 대한 첩보를 생산했지만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엔 현직 장관이 실세 친인척에게 특혜성 예산 지원을 했다는 의혹, 친 정권 성향 사업가에 대한 입찰 밀어주기 등이 포함됐다. 한 특감반원은 주변에 “열심히 첩보를 만들었는데 윗선에서 뭉갰다”며 불만을 터트렸다는 후문이다. 반부패비서관실 소속 특감반원들이 전원 교체된 배경에 괘씸죄가 작용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대목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재계 사정드라이브로 이어지나” 특감반 사태 불똥 튄 까닭 김 씨에 대한 검찰조사는 ‘투트랙’으로 진행 중이다. 청와대가 고발한 공무상 비밀누설혐의는 수원지검이, 특감반원 시절 비위 의혹에 대해선 대검 감찰본부가 맡았다. 청와대 기류를 감안하면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살벌한 상황이다. 검찰도 비장한 각오로 보인다. 청와대가 실시간으로 상황을 체크 중인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특히 재계는 그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정보·대관 파트를 운용하는 기업들로선 김 씨를 비롯한 특감반원들과의 교류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정보 업무 관계자는 “그들이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지냈다. 정보 분야에 몸담으면서 얼굴을 익혔다. 정기적 모임 등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였다. 김 씨 역시 검찰에서 오랫동안 정보 업무를 담당해서 기업 ‘정보맨’들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했다. 첫 타깃은 KT였다. 대검 감찰본부는 김 씨 등 특감반원들과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진 KT 임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김 씨와 KT 임원의 휴대폰 압수수색, 골프장 압수수색 등을 통해 골프 비용은 누가 냈는지,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본다는 방침이다. 감찰본부는 KT의 또 다른 대관파트 직원이 김 씨가 아닌 전직 특감반원과 어울리며 여러 차례 향응을 접대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확인할 것으로 알려졌다. KT 측은 “검찰 수사 중인 사안으로 입장을 밝힐 단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KT 외에도 반부패비서관 소속 전직 특감반원들과 어울렸던 직원이 속한 기업 3~4곳도 수사선상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모두 10대 그룹에 속한 내로라하는 기업이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사정당국 안팎에선 문재인 정부 중반기에 이뤄질 기업 사정과 맞물릴 가능성도 대두된다. ‘특감반 사태’ 나비효과가 재계를 향한 사정 드라이브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검찰 고위 인사의 말이다. “지금은 검찰도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 직원으로 인해 정국이 쑥대밭이 됐기 때문이다. 전직 특감반원들이 기업 관계자들과 자주 만나 접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회사 이권과 관련된 첩보까지 생산했다는 의혹이 있다. 한 기업 관계자의 경우 특감반원으로부터 청와대 기밀들을 건네받았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이런 부분들까지 다 포함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업 정보 관계자들은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또 다른 기업의 정보 관계자는 “솔직히 그들과 만나 밥이나 술을 먹을 때 우리가 대부분 계산하는 것은 사실이다.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이런 걸 두고 ‘스폰서’라고도 하는데 전혀 아니다. 비슷한 업무를 하다 보니 청와대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지냈고, 서로 파트너처럼 협조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런 관계를 문제 삼으면 정보 파트를 갖고 있는 기업 중 걸리지 않을 곳은 단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