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괄 사표 요구받은 부원장보 몇몇 항명…상급기관 금융위는 예산·권한 문제로 윤 원장 흔들어
지난해 12월 26일 늦은 오후. 유광열 금융감독원(금감원) 수석부원장은 9명의 금감원 부원장보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부원장보들은 2019년 경영계획 등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유 수석부원장은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꺼냈다. 그는 부원장보 9명 전원에게 “사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윤석헌 금감원장의 뜻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1월 부원장보 임원 인사를 앞두고 기존 임원에 대해 재신임을 묻는 성격의 사표를 요구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부원장보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표 제출을 거부하며 사실상 항명에 들어갔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지난해 7월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브리핑룸에서 열린 금융감독혁신 과제 발표 브리핑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원장이 사표를 요구한 대상은 민병진(기획·경영), 최성일(전략감독), 오승원(은행), 윤창의(중소서민), 김도인(금융투자), 조효제(공시조사), 설인배(보험), 정성웅(금융소비자 보호), 박권추(회계) 부원장보다. 최흥식 전 금감원장은 2017년 11월 채용비리 등으로 얼룩진 금감원 조직쇄신 차원에서 부원장보 9명을 이들로 교체했다. 부임한 지 1년여 남짓인 부원장보들의 임기는 아직 2년 남아 있다.
윤 원장은 부원장 3명에 대해선 사표 요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원장보는 금감원장이 직접 임명하지만 부원장은 금감원장의 제청으로 금융위가 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원장들 역시 재신임의 선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유광열 수석부원장을 제외한 권인원(은행·중소서민), 원승연(자본시장·회계), 이상제(보험·금융소비자보호) 부원장은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원 부원장은 2017년 11월, 권 부원장과 이 부원장은 2017년 12월 임기를 시작했다. 이들도 임기가 3년이다. 금감당국 고위 관계자는 “부원장 인사권은 금융위에 있지만 부원장보들이 일괄 사표를 내는 상황에서 부원장들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도 “조직쇄신 차원에서 엄격한 평가를 거쳐 임명된 사람들을 모두 나가라고 한 것”이라면서 “더구나 임기를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통을 피할 수 없는 조치”라는 우려가 나왔다.
사실 금감원장의 일괄 사표 제출 요구는 처음이 아니다. 최수현·진웅섭 전 원장 취임 당시에도 임원들이 재신임 차원에서 일괄 사표를 제출했고 일부는 교체됐다. 최흥식 전 원장은 부원장보 이상 임원 13명 전원을 교체했다.
이번 인사는 윤 원장이 지난해 5월 취임한 후 처음 시도하는 인사다. 윤 원장은 전임 금감원장 2명이 연이어 물러나면서 조직 안정을 위해 임원 인사를 하지 않았다. 금융권에선 금감원 임원 인사가 마무리되면 윤 원장이 금융감독과 시장에 대한 혁신 드라이브를 더 강하게 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윤 원장은 지난 연말 “이미 금융회사 시스템(지배구조) 문제와 소비자 보호, 시장규율의 혁신 필요성을 계속해서 얘기했고, 2019년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업무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퇴로’가 막힌 일부 부원장보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태세라는 점이다. 임기 3년 중 1년여밖에 소화하지 못했다는 명분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공직자윤리법상 임원은 업무연관성이 있는 유관기관에 3년간 재취업할 수 없다는 현실이 부원장보들을 가로막고 있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낙하산 인사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고 해서 부원장보들의 금융권 재취업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아직 50대 초중반인 부원장보들이 사퇴한 뒤에도 후폭풍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원장은 외부에서도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윤 원장은 지난해 말 금감원 예산 문제를 두고 금융위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최근에는 ‘금융권 길들이기’란 비판 속에 사라졌다가 부활한 금융사 종합검사제를 놓고 금융위와 삐그덕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감원의 상급기관인 금융위가 종합검사제 부활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정적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같은 날 배포한 신년사에서 “시장의 자율과 창의를 제약하는 낡은 규제 틀은 버리고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며 “암묵적 규제, 보신적 업무처리, 과중한 검사·제재 등 혁신의 발목을 잡는 금융감독 행태를 과감히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직접적으로 종합검사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과중한 검사·제재’, ‘혁신의 발목을 잡는 금융감독 행태’ 등의 표현으로 금감원이 금융사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있다는 시각을 내비쳤다.
이렇듯 윤 원장은 안팎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그의 입지가 달라질 전망이다. 금융권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당장은 문제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지만 언제든 다시 충돌할 여지는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