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묘지 훼손 이어 2015년엔 급기야…경찰 “사탄주의 신봉자 소행 가능성 높아”
영화 ‘노스페라투’(1922) 스틸 컷
무성영화 시절, 독일엔 두 명의 거장이 있었다. 프리츠 랑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다. 두 사람은 모두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로 건너 와 활동했고, 무르나우는 ‘선라이즈’(1927)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개의 트로피를 가져가며 독일에서의 명성을 이어간다. 이후 그는 ‘포 데블스’(1928) ‘시티 걸’(1930) 등의 영화를 내놓으며 승승장구했고 ‘타부’(1931)가 이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된다. ‘타부’ 개봉 일주일 전, 그는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 남동쪽 린컨 해변 근처에 있는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에서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193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고작 43세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하지만 2015년 7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묘지 관리인인 올라프 일레펠트는 월요일 오전에 출근해 묘지를 둘러보던 중 무르나우의 묘역이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 단순한 훼손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관을 열어 무르나우의 해골을 훔쳐 간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경찰은 관 주변에서 초와 촛농 그리고 분필 자국을 발견했다. 수사 결과 악마 숭배자들의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분필 자국은 사탄 숭배 의식의 흔적처럼 보였고, 검은 촛농과 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개골 부분만 사라진 것도 유력한 증거였다. 무르나우의 묘지 옆엔 두 형제의 묘도 있었지만 전혀 손대지 않았다. 오로지 무르나우만 대상이었다.
사실 무르나우의 묘지가 고초를 겪은 건 오래된 일이었다. 1970년대부터 그의 관 뚜껑이 열린 채 발견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스페라투’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최초로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이 영화는 무르나우를 단순한 영화감독이 아닌, 영적이며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뱀파이어 숭배자들에게 무르나우는 위대한 선각자처럼 여겨졌고, 그들은 무르나우의 유해를 신성하게 생각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마저 떠돌았는데, ‘노스페라투’에서 흡혈귀인 올로크 백작 역을 맡은 막스 슈렉이라는 배우가 실제로 뱀파이어라는 설이었다. 2000년에 만들어진 ‘쉐도우 오브 뱀파이어’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로, 무르나우가 진짜 뱀파이어인 슈렉을 배우로 기용해 ‘노스페라투’를 찍을 당시의 이야기를 담은 픽션이었고, 슈렉 역을 맡은 윌렘 데포는 그 해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무르나우의 묘지는 뱀파이어의 존재를 깊게 믿는 사람들이나 사탄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되었고, 심심찮게 묘지 훼손이 일어났던 것. 게다가 당시 독일은 음성적으로 사탄주의가 번성하고 있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2001년에 있었던 루다 부부 사건이었다. 그들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프랭크 하케르트라는 제빵사를 난도질해서 죽인 뒤 악마의 의식의 제물로 삼았다. 주도자인 남편 다니엘은 15년형을 받고 감옥에 있을 때 뱀파이어처럼 송곳니를 갈기도 했는데, 경찰 조사 자료를 보면 다른 사탄주의자들과 함께 무르나우의 묘지를 참배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르나우의 묘지
2008년엔 ‘라우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사탄 숭배 집단에서 탈출해 그 실체를 폭로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마녀들의 집회에서 강간과 고문을 견디며 시달렸다는 것. 그 조직은 젊은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몰며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어느 종교 전문가는 조사 결과 정기적으로 블랙 미사 의식을 비밀리에 하고 있는 악마의 조직이 독일 전역에 퍼져 있다는 걸 밝혀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무르나우의 해골을 훔쳐간 범인을 사탄주의자로 결론 내린 건 무리가 아니었고, 독일에만 약 7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그들 가운데 한 무리가 자신들의 오컬트 의식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회를 테러로 폭파하겠다는 위협도 여러 번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묘지 관리 당국은 무르나우의 묘를 영구 봉인하거나 관을 다른 곳에 옮겨 철통 보안 속에 관리하는 등의 고민을 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대안이 마련되진 않은 상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