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자 자소서 써봤자 나이·학점 필터링으로 자동 탈락… ‘보이지 않는 손’ 작용 땐 멋대로 점수 조작
고위 공직자나 주요 고객의 자녀·친인척을 특혜 채용한 혐의로 기소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이 지난 10일 법정구속됐다. 연합뉴스
우리은행은 채용비리와 관련 금융권 최초로 당시 행장이 구속됐다. 이광구 전 행장은 2015~2017년 지인 등 권력자의 청탁을 받고 37명에 대해 채용과정을 조작한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은행 채용 첫 단계인 자기소개서는 수천 자를 채워야 해 취업준비생 사이에서는 ‘자소설(자기소개서+소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인사부 직원들은 지원자들의 서류를 필터링해 채 읽기조차 하지 않았다. 2015년과 2016년 지원자 가운데 1만 개의 자기소개서만 평가대상으로 검토됐다. 나머지 지원자는 나이, 학점 등을 기준으로 걸러졌다. 걸러진 대상자에 대해서는 인사부 직원이 모여 외국어 특기자나 명문대, 청탁자 등을 위주로 구제 회의가 이뤄졌다.
우리은행은 크게 지원자의 지역, 대학, 남녀별로 쿼터를 두고 인위적으로 합격비율을 조정했다. 이 부분이 큰 논란이 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당초 지원자격에 미달되는 경우, 합격권에 들지 못해 탈락한 경우에도 청탁에 의해 합격시킨 데 있다. 정당한 실력에 의해 합격한 지원자 가운데에는 부정 청탁자를 합격시키기 위해 탈락시킨 지원자가 적지 않다.
2017년 우리은행 채용에 관한 설명은 필터링이 없고 학력이나 나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적시했다. 사람인 캡처.
#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
2017년 5월 이뤄진 개인금융서비스직군 채용에서 이상구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의 자녀가 최종 합격했다. 이 아무개 씨는 학점이 3점이 채 되지 않아 관행처럼 이뤄지던 학점 필터링 대상자였다. 서류평가 결과 이 씨는 ‘은행장 결정이 없으면 불합격 대상’이라고 보고됐다. 보고를 받은 이광구 행장은 ‘이상구 부원장보의 딸을 합격시키라’는 청탁명부의 합격란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청탁명부를 건네받은 실무자는 합격권에 있던 지원자 한 명을 탈락시켰다.
어렵사리 면접전형에 올라간 이 씨는 1차 면접에서 불합격권에 들었다. 다시 이 행장은 “2차 면접 기회를 줘서 합격시켜라”는 취지로 청탁명부의 이 씨 합격란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이 씨의 채용 과정에 연달아 이 행장이 직접 친 동그라미가 생겼고 면접 점수도 합격권에 맞춰 조작됐다.
이 전 부원장보는 2015~2017년 사이 조카 신 아무개 씨, 감 아무개 씨에 대해서도 채용을 청탁했다. 이들은 각각 서류전형 불합격, 서류전형 필터링 대상이었으나 합격자 조작으로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이 전 부원장보의 또다른 자녀가 신한은행에 재직 중이어서 채용청탁의 불똥이 튀기도 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 부원장보의 아들 이 아무개 씨는 신한은행 채용 당시 인성과 적성결과가 하위권이고 실무자 면접 성적은 최하위권에 해당했다. 이 때문에 금융사를 감독하는 금융감독원 지위를 이용해 이 부원장보가 자녀를 모두 금융사에 취직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 금융계 OB의 저력
뿐만 아니라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은 신한사태로 회사를 떠난 뒤에도 신한은행 채용청탁 명단에 그 이름을 남겼다.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신입직원 가운데 청탁자를 따로 관리해왔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2013년도 자료에는 지원자별 비고란에 청탁자와 청탁경로가 적시돼 있다. 청탁자로 ‘신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또한 2012년도 자료에도 ‘신 사장님’을 청탁경로로 작성한 내용이 발견됐다.
게다가 우리은행 사외이사가 된 뒤에도 신 전 사장은 채용청탁에 연루됐다. 사외이사로 우리은행의 경영을 감시하는 역할임에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채용을 청탁했다는 점에서 본분을 져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 전 사장은 2017년 우리은행 채용에 지인의 자녀 2명의 채용을 청탁했다. 불합격권에 들었던 두 지원자는 모두 합격했다. 신 사외이사가 청탁한 지원자 백 아무개 씨는 서류전형의 필터링 대상이었으나 성적 조작으로 면접에 올랐고, 면접에서도 최하위 점수를 받았지만 합격했다. 또 다른 청탁자 조 아무개 씨는 면접점수 조작으로 최종합격했다.
신 전 사장은 “수년 전 일이라 지금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바가 없다. 청탁이라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은데 채용청탁을 했냐니 말도 안 된다”며 “특히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데 채용을 청탁하는 건 내가 늘 지양했던 바”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그동안 내부적으로 쉬쉬하던 치부가 드러났다는 분위기다. 내부직원이나 거래처, 정부관계자 자녀를 채용해오던 게 공공연하다는 것. 하지만 이런 금융사의 채용비리는 관치금융을 강화시키고 금융공공성을 해치는 주범이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다 말할 수 없고, 공소시효가 끝나 그렇지 간부들 채용청탁은 말도 못하게 많다”며 “공정성이 대두되는 사회흐름은 차치하고, 금융당국과 사외이사의 채용청탁은 심각한 문제로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 비극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