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업무 기술표준원에 이관해 원인 규명 중…산업부는 ‘수소 경제’ 올인?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산업부는 ESS를 신재생에너지정책단 내 에너지신산업과의 주요 정책 과제에서 제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 ESS 보급 등 정책 개발을 담당했던 에너지신산업과는 신재생에너지정책과로 명칭이 변경, ESS 업무 상당 부분을 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정책국으로 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산업부 산하 기관으로 최근 ESS 사고조사위원회를 출범하는 등 ESS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울산시 남구 대성산업가스 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 불이 나 건물 밖으로 화염이 치솟는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SS는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나 저렴한 심야 전력을 미리 저장해뒀다가 꺼내 쓰는 장치로,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강화 정책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앞서 정부는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한 후 ESS에 한 번이라도 저장했다가 팔면 한국전력공사가 5배 높은 가격에 전기를 사 가도록 하는 보조금을 지원했다. ESS에 전기를 충전했다 사용하는 사업장에는 전기요금을 절반으로 깎아줬다. 이 같은 혜택은 ESS 수요 확대로 이어져 2016년 66개였던 신규 설치는 2017년과 2018년 265개, 782개로 급증했다.
ESS 설치 지원금과 보조금 명목으로 수천억 원 예산을 쏟아부은 정부는 그러나 화재가 급증하자 한 발 물러났다. 특히 지난해 11월 전국 ESS 사업장 1300곳에 대한 정밀안전진단에 들어갔지만, 안전진단을 받은 사업장에서도 불이 나면서 ESS 보급 정책을 중단했다. 사실상 골칫거리로 전락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실제 정부가 안전진단 대책을 내놓은 이후 발생한 6번 화재 중 4번은 안전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불이 난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부는 “ESS 보급보다 화재 원인 규명이 중요해 ESS 업무 상당 부분이 국가기술표준원으로 이관된 것뿐”이라고 설명했지만, 배터리업계는 정부가 ESS 생태계 축소에 나섰다고 보고 있다. ESS 업무 전반을 담당했던 에너지신산업과 인력 대부분이 수소 경제 업무로 재배치, 부서 중점 업무를 수소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산업부 한 관계자는 “부서장(과장)을 포함한 신산업과 10명 중 8명(서기관·사무관 포함)의 업무분장이 수소로 바뀌었다”며 “기존 ESS 정책은 수소의 부차 업무가 됐고, 정책 중요도도 수소 경제 강조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산업부가 ESS 화재에 따른 책임은 지지 않고 ‘정치적 코드’ 맞추기에만 급급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수소차 부문은 내가 아주 홍보 모델이에요”라고 말하자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산업부는 올해 안에 가칭 수소 경제법 제정에 나선다는 방침도 밝혔다.
정부는 ESS 사업장 정밀안전진단에 들어간 뒤 점검을 받지 않은 시설에 대해선 가동중지 명령을 내린 상태다. 배터리업계 한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 첨병으로 ESS를 밀어붙이더니 막상 책임질 일이 터지니까 힘없는 국가기술표준원에 일을 떠넘기고, 산업부는 수소 경제로 돌아서고 있다”면서 “에너지신산업과의 수소 경제 전환은 ESS 가동 중단 사태에서 신재생에너지 보급 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수소 경제의 허구가 드러나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산업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은 지난 1월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과 산업기술시험원, 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 등 시험 기관과 학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ESS 사고조사위원회를 출범, 2월 중 1차 조사 결과를 논의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규현 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정책과 과장은 “삼성전자 노트7 배터리 폭발 사고를 조사했던 국가기술표준원이 ESS 화재 사고 원인을 우선 규명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업무 상당 부분이 이관된 것뿐”이라며 “신재생에너지 관련 산업 발전과 보급 관련 업무는 여전히 에너지신산업과 담당”이라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
ESS 화재 원인 ‘습기’로 좁혀지나 ESS 화재 관련 원인 규명에 나선 LG화학과 삼성SDI, 한국전력공사 등 설비 제조사가 ESS 화재 원인을 ‘노출 환경’으로 좁힌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11월 이후 진행한 ESS 화재 원인 조사 결과 화재 발생 사업장 ESS 장비 하부에 결로(結露) 등 습기가 발견되고 있는 탓이다. ESS 화재 원인 규명 조사단에 참여하고 있는 한 설비 제조사 관계자는 “ESS 장비 하부에 얼음이 얼어 있거나 땅이 질척한 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면서 “ESS 핵심 부품인 배터리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물과 반응하면 온도가 올라가고 폭발하는 등 화재 위험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지난 21일 대성산업가스 울산공장에서 발생한 ESS 화재 원인은 습기로 좁혀지고 있다. 당시 울산 남부소방서는 “배터리가 물과 반응하면 그 자체로 타게 된다”고 말했다. ESS 화재는 경북 경산변전소, 전남 영암 풍력발전소 등 지난해에만 16번, 총 21번 발생했다. 김준호 국가기술표준원 연구관은 “ESS는 전력저장원과 전력변환장치(PCS), 전력관리시스템(BMS) 등이 합쳐져 있는 복합 장비”라며 “화재 원인을 특정하기는 이른 단계로 배터리 생산 업체는 물론 시공업체, 관리업체, 운용업체 등 70여 개 업체를 전수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