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연금·종합검사 막히자 소송지원제도 꺼내
즉시연금 문제로 삼성생명과 전면전을 앞둔 금융감독원이 암초에 부딪혔다. 종합검사와 금융그룹통합감독 등 반격에 나설 카드가 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윤석헌 원장이 임기 내 자존심을 회복할지 관심을 모은다.
윤석헌 원장은 지난 8일 금감원 팀장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성재 보험담당 부원장보, 박상욱 생명보험검사국장에 이어 생명보험검사국 검사기획팀에는 윤영준 팀장을 배치했다. 삼성생명은 김일태 생명보험검사국 1팀장이 맡을 전망이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지난해 7월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브리핑룸에서 열린 금융감독혁신 과제 발표 브리핑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생명보험검사국 팀장급 인사에 금융권의 관심이 쏠린 이유는 금감원이 삼성생명과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 안팎에서는 윤 원장이 최전방에 나설 실무 팀장 인사를 통해 즉시연금 미지급 사태와 생명보험사 종합검사에서 전면전을 펼칠 진용을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원장이 업계 1위 삼성생명을 상대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이는 것은 금감원의 자존심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금감원은 생명보험사들이 판매한 즉시연금상품과 관련해 약관에 문제가 있었다며 소비자들에게 돈을 더 지급하라는 권고를 내렸지만, 삼성생명은 한화생명과 더불어 이를 거부하며 사실상 ‘항명’에 돌입했다.
즉시연금은 가입자가 처음 가입할 때 보험료 전액을 한꺼번에 내면 보험사가 매달 연금형태로 이자를 지급하고, 만기시에는 처음에 납부한 보험료 전액을 돌려주는 보험상품이다. 하지만 정작 보험사들이 약속한 연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연금액을 덜 받았다는 민원이 지난해 금감원에 여럿 접수됐다. 금감원은 조사에 나섰고, 연금액에서 만기보험금으로 지급할 금액의 일부를 뗀 금액만 지급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구나 보험사들은 이런 내용을 약관에 기재하지 않아 사실상 소비자들을 속였다고 금감원은 판단했다.
금감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21개 생명보험사에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연금액을 일괄적으로 지급할 것을 권고했지만, 삼성생명은 이를 거부하고 금감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한 민원인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말이 ‘권고’이지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금감원의 결정을 삼성생명이 거부한 것도 모자라 되레 역공을 펼치자 금감원은 다소 당황했다. 다른 ‘을’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어서 자존심에도 상처가 났다. 하지만 곧 ‘검사권’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며 맞대응에 나섰다.
금감원은 올 초 ‘금융회사 종합검사 계획안’을 마련, 삼성생명을 검사 대상 리스트 맨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종합검사는 금융회사를 속된 말로 ‘탈탈 털어버리는’ 작업으로, 결과에 따라 최고경영자(CEO) 해임권고 등 중징계 조치도 내릴 수 있는 초강력 카드다. 하지만 이 ‘종합검사 계획안’이 금융위원회에서 퇴짜를 맞으면서 윤 원장은 또 한 번 자존심을 구기게 됐다.
금융위는 ‘보복성검사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금감원의 계획안을 보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위는 오는 20일 열리는 정례회의에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미 당초 예정보다 한 달가량 늦어진 데다 내용이 바뀔 수도 있어 윤 원장의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종합검사를 시작하는 시기도 빨라야 4월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의 올해 종합검사가 완화되거나 검사 대상이 크게 줄어들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첫 타자로 꼽혔던 삼성생명이 하반기로 밀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윤 원장이 삼성생명을 압박할 또 다른 카드인 ‘금융그룹통합감독 제도’ 도입도 삐걱대고 있다. 금융그룹통합감독은 비금융 계열사의 재무와 경영위험 등이 금융그룹의 부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내용으로, 그룹 차원의 지배구조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관련 법안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윤 원장의 조바심을 부추기고 있다.
금융권은 상황이 꼬이면서 윤 원장이 플랜B를 짜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14일 즉시연금 소송을 맡을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원에 변론 내용을 담은 준비서면을 제출하는 등 민원인에 대한 소송 지원에 착수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윤 원장이 ‘소송지원제도’라는 새 카드를 꺼낸 것으로 해석한다.
소송지원제도는 고객이 금융사와 법정다툼을 벌일 때 금융감독당국이 변호사를 대신 선임하는 등 법률적 지원에 나서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소송 지원 범위 등의 세부사항을 금감원장이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전방위적인 무제한 지원이 가능하다.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금감원이 소비자를 앞세워 법정에서 삼성생명을 굴복시키는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즉시연금으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민원인만 16만 명에 달하는 만큼 일단 명분 싸움에서는 금감원이 승기를 잡고 시작하는 셈”이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