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응조치 미국 대신 한국이 맡겠다’ 정부 의지…기업들 사업 지속성 불안 ‘남는 장사’ 확신 때 투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나는 대북 제재를 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이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라며 제재 완화에 대해 언급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앞서 지난 1월 22일 “지금은 민간부문 역할이 없다”며 “만약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를 만들어내고 올바른 조건이 형성된다면, 민간부문이 북한에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6월 열린 제1차 북미정상회담이 생중계되고 있는 전광판과 그 너머의 청와대. 최준필 기자
문재인 대통령도 대북 제재 완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에서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 그것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라며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견인하기 위한 상응조치로서 한국의 역할을 활용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역할 떠맡을 각오’, ‘부담 덜어줄 길’의 의미는 무엇일까. 야당 등 정치권 일부에서는 문 대통령 발언을 두고 ‘퍼주기’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반면 여당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완화 협상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 주는 전략적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대표의장은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완벽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 제재 완화를 해주면 미국 내부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며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합의를 하는 데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국 정부가 남북경협을 통해 북한의 경제지원 상응조치 역할을 맡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이어 김 의장은 “만약 북미정상회담이 급물살을 타게 되면 북한 시장 진출을 중국, 일본 등도 노릴 것”이라며 “경협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북한과 평화국면이 정착되고 경협이 활성화되면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강국들이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은 부담을 떠맡겠다고 표현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선제적으로 들어가 주도권을 갖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북경협 사업을 국가 차원에서만 투자해 진행하기는 무리다. 기업들의 역할도 필수적이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주요 대기업에서는 남북경협 관련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남북경협의 길이 열려도 대기업들이 바로 투자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앞의 재계 고위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기업들도 나서 북한에 투자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기업들 입장에서도 신경 안 쓸 수는 없다”면서도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수익성이 없으면 북한에 투자해 들어가기는 어려우며 정부도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기업에 투자를 강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남북경협이 활성화돼 철도와 도로, 다리, 전력시설 등 사회간접자본(SOC) 개발이 진행되면 투자업계에서도 펀드를 구성하고 투자자를 모으는 사업을 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실체가 없으니 선행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정상회담을 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청와대
일부 언론에서는 남북경협에 관심을 보인 기업들에 자문을 해줬다는 한 외교소식통의 말을 빌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삼성 등 주요 기업이 북측과 사업제안서를 주고받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이미 남북경협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은 1999년부터 10년 동안 평양에서 TV와 전화기, 라디오 등을 생산한 적이 있다. LG전자도 1996년부터 2009년까지 TV조립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당시 평양정상회담에서 진지한 사업 투자 논의는 오가지 않았다는 전언도 있다. 총수가 지난해 평양을 방문한 한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북측과 사업제안서를 주고받은 것 같지는 않다. 진지한 투자계획이 오갔다면 내부 회의에서 거론되지 않았겠느냐”며 “평양 방문 이후 따로 언급된 내용은 없었다”고 전했다.
과거와 달리 북한의 상황이나 국내 대기업의 사업이 많이 바뀌어 북한에 진출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앞의 관계자는 “삼성, SK, LG 등 주요 대기업들은 현재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세밀한 첨단기술을 요하는 제조업 중심이어서 안정적인 대형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라며 “그러나 현재 북한의 전력, 도로 등 인프라가 좋지 않아 대기업이 북한 진출을 검토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당분간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와 그에 따른 남북경협 움직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