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금융 중에선 우리금융 회장만 동행…금융포럼도 취소돼 민관 시너지 물건너가
금융권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 시내 평화의 궁전에서 열리는 ‘한-캄보디아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김영주 한국무역협회장과 끗맹 캄보디아 상공회의소 의장의 인사말을 전한 뒤, 훈 센 총리와 문 대통령이 순서대로 기조연설에 나섰다. 이어 양국 행사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하는 양국 정상 오찬이 진행됐다.
아세안 3개국을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오후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 도착, 콩솜올 부총리 겸 왕실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 행사에 경제계의 관심이 쏠린 이유는 1년 넘게 계속된 문 대통령의 신남방 행보 가운데 실질적으로 경제 분야에 중심을 둔 첫 대외행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말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신남방 정책을 천명한 뒤 이듬해 3월 아세안 벨트의 핵심인 베트남을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 일정은 경제보다 정치·문화적 교류에 맞춰졌다.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과 만남으로 시작해 정부 주요 지도자들과 면담 등이 이뤄지는 와중, 경제와 관련된 스케줄은 한국과학기술원의 현지 연구소 착공식에 참석한 정도였다.
이 때문에 현지에서 열리는 한-캄보디아 비즈니스 포럼을 통해 문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시선이 쏠렸다. 신남방 정책에 대한 우리 정부의 구체적인 기조가 나올 가능성이 커서다. 특히 국내 기업인들은 오찬이 끝난 후 진행되는 현지 사업 사례 발표들에 주목했다. 우리 정부가 신남방 정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반면 금융권에서는 실망감이 감돌고 있다. 여러 면에서 금융권의 영향력이 축소돼서다. 더욱이 기대했던 경제 포럼 발표에서 금융사들이 제대로 마이크조차 잡지 못하자 볼멘소리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한-캄보디아 비즈니스 포럼의 오후 순서로 진행된 6개의 발표 중 민간 금융사의 몫은 1개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용만 DGB특수은행장이 진행하는 ‘금융 및 기업문화를 중심으로 한 현지화 성공 사례’ 발표다. 현지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계 금융사가 20여 개에 이르는 점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한 결과라는 평가다.
이마저도 사실상 금융권에 별도 배정된 섹션으로 보기 힘들다는 뒷말이 나온다. 이 행장도 캄보디아에 나가 있는 한국 기업 모임의 대표인 덕분에 발표자로 나서게 됐을 뿐 금융의 중요성을 감안한 선택이 아니란 얘기다. 이 행장은 지난해부터 캄보디아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다.
나머지 민간 기업인들은 대부분 산업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우선 이창훈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 캄보디아 법인장이 ‘캄보디아 우수 농산물과 한국 제조·유통 노하우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다. 또 쏙 피셋 지 기어(G Gear) 대표이사가 ‘캄보디아에 희망을 전하는 LG전자 스토리’라는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G Gear는 LG전자 제품의 캄보디아 독점 판매권을 가진 회사다. IT 분야에서는 ‘한국형 정보통신기술 교육을 통한 스타트업 인재 양성’이라는 제목으로 김태경 캄보디아 코리아소프트웨어HRD센터장의 추가 발표가 이뤄졌다.
이 같은 금융권의 영역 제한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다. 문 대통령과 동행할 것으로 보였던 금융권 CEO들의 이탈이 이어져서다. 당초 순방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던 함영주 KEB하나은행장과 김도진 IBK기업은행장은 끝내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 함영주 행장은 표면적으로 순방국과 사업 연관성이 낮아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EB하나은행은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에 별도의 영업망이 없다.
최근 동남아 출장을 다녀온 허인 KB국민은행장과 이대훈 NH농협은행장도 명단에서 빠졌다. 결국 금융권 CEO 중에서는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과 김태오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 은성수 한국수출입은행장, 김태영 은행연합회장 정도만 신남방행에 함께했다. 4대 금융지주 중에서는 손태승 회장만 유일하게 동참한 모양새가 됐다. 우리은행은 국내 은행 중 가장 많은 해외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26개국 430개 영업망을 갖추고 있는데 최근 캄보디아 WB파이낸스 법인은 동남아 차량공유업체인 ‘그랩(Grab)’과 손잡고 그랩 드라이버 대상 저금리 대출상품을 선보였다.
신한은행에서는 행장 대신 정지호 부문장이, KB금융에서는 CEO 대신 최창수 국민은행 글로벌사업본부 상무가 캄보디아에서 열리는 한·말레이시아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했다. 이 포럼은 양국 정부와 기업인 450여 명이 참석해 양국 간 경제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는 지난해 7월 문 대통령의 인도 방문에 금융권 CEO들이 대거 동행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김도진 IBK기업은행장,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위성호 신한은행장, 손태승 우리은행장, 김병원 농협중앙회 회장, 박진회 한국씨티은행장 등이 함께했다. 2017년 중국 국빈방문에도 4대 시중은행장을 비롯해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장 등이 총출동한 바 있다.
금융위원회(금융위)가 문 대통령 순방에 맞춰 캄보디아에서 별도의 금융 비즈니스 포럼을 개최하려 했다가 취소한 것도 심상치 않은 기류로 풀이된다. 당초 금융위는 최종구 위원장과 금융지주·은행 수장들이 대부분 참석해 캄보디아 금융당국, 금융사와 금융 비즈니스 포럼을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순방을 앞두고 하반기로 미뤄졌다. 금융 비즈니스 포럼은 국내 금융당국과 금융권 수장들이 현지 금융당국과 금융사 협력을 논의하는 자리다. 캄보디아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는 국민·신한·우리·대구·전북은행과 국민카드 등 14곳에 달한다.
이렇듯 문 대통령의 신남방 정책 확장을 위한 경제사절단에 금융권 인사들이 빠지면서 기대했던 민관 시너지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권에서는 정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금융의 역할에 정부가 좀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아울러 당장의 기업 진출 성과에만 목을 매기보다 장기적인 성장 토대를 위한 금융의 중요성에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해외 시장에서 소위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만드는 기업들에만 신경을 쓰고 물밑에서 활약하는 금융의 역할을 간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며 “국내 금융사들이 해외에서 기반을 마련해야 현지에 진출하는 기업의 자금 조달 등 지원사격도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