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학원, 신흥무관학교 후신 신흥대학 인수 과정 강탈 의혹…‘선긋기’ 애써와
문재인 대통령은 2월 27일 육사 제75기 졸업 및 임관식을 맞아 교수 요원인 최큰별 소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 친서에서 문 대통령은 “여러분이 임관하는 올해는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라며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적 뿌리는 100여 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이른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나온 독립군의 희생정신이 ‘안이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는 육사 생도의 신조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무리한 역사 연결짓기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은 경희대인 까닭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중국 만주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이후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신흥전문학원이 됐다가 신흥대학으로 승격된 뒤 경희대로 교명이 바뀌었다. 반면 육사의 시초는 1945년 12월 개교한 군사영어학교다. 이후 이 학교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등으로 불리다가 1948년 육군사관학교라는 이름이 자리 잡혔다.
이런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광복회를 비롯 광복의 재조명을 외치는 일부 단체의 역사관과 비슷하다. 이들 단체는 육사도 대한제국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이어받고 독립운동사와 독립군 역사가 교육돼야 한다는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의 문제 제기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 왔다. 서 교수는 “육사는 조국광복 후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됐지만 연원을 다른 데에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육사의 뿌리와 정신적 연원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이 광복군의 정신과 같으니 육사도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받은 한 몸이란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육사와 신흥무관학교와의 무리한 연결 짓기를 시도하자 되레 화색이 돈 건 문 대통령이 졸업한 경희대였다. 경희대는 이제껏 신흥무관학교와의 관계를 희석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 온 까닭이다. 경희대를 소유한 경희학원의 초대 이사장인 고 조영식 전 이사장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탈 의혹’으로 살아생전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군인 출신이 중심이 돼 신흥강습소란 이름으로 시작했다. 김원봉 등 굵직한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했다. 1919년 3·1운동 뒤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고 광복 뒤인 1947년에는 서울 종로에 터전을 잡았다. 신흥전문학원이라고 간판을 바꿔 달고는 1949년 2년제 신흥초급대학으로 인가 받은 뒤 1950년 3월 동양외국어전문학관을 흡수하며 4년제 종합대학을 꿈꿨다.
1950년 5월 189명을 제2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신흥대학은 그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사건을 맞이한다. 6·25였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신흥대학을 소유한 성재학원의 수장 이시영 전 이사장과 이규창 학장 등은 학교 행정 관련 서류를 안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주요 문서 안에는 정부와 법원에 등록된 신흥대학 소유법인 성재학원의 이사 5명 인감, 졸업생 명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가 신흥대학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경희대 공식 학교역사서 ‘경희20년사’에 따르면 신흥대학은 1951년 당시 ‘막대한 부채’로 고생했다. 이시영 전 이사장은 학교재단을 이끌 사람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조영식 전 이사장을 발견한 뒤 “젊고 의지가 굳세며 패기가 있는 조 선생이 맡아주지 않으면 문을 닫고 폐교할 수밖에 없다”며 신흥대학을 백지인수해 달라고 했다. 조 전 이사장은 고심 끝에 1951년 5월 18일 부채 1500만 원을 짊어지는 조건으로 신흥대학을 인수했다.
조영식 전 이사장이 신흥대학을 인수하는 과정에 아직까지도 의문 부호가 붙는 이유는 이시영 전 이사장이 부채만 떠넘기는 조건으로 신흥대학을 넘긴 게 석연치 않다는 이유와 당시의 정치적 배경, 경희대의 꾸준한 선 긋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 이사장은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이었는데 학교의 주인이 바뀔 때쯤 부통령직을 내놓는 등 이 전 대통령과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은 바 있었다. 게다가 조 전 이사장 등 신흥대학의 새로운 이사진은 친 이승만 계열 인사로 채워졌다. 조 전 이사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 전신인 ‘공화민정회’ 사무차장이었다.
1953년 3월 6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신흥대학 이사진 5명 가운데 2명이 6·25 때 행방불명이 됐고 1명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이사장을 포함 이사 5명 가운데 3명이 없는 상태에서 조영식 전 이사장과 김인선 당시 국회의원이 새 이사진으로 선임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 전 이사장은 물론 김 전 의원의 든든한 뒷배였다. 조 전 이사장과 김 전 의원은 이규창 학장을 파면하고 성재학원 중심에 섰다. 성재학원 이사 5명의 인감을 포함한 재단 인감은 조 전 이사장에게 넘어갔다. 1955년 신흥대학은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로 승격됐고 1960년대 들어 경희대학교로 간판을 바꿨다.
경희대가 밝힌 당시 신흥대학의 ‘막대한 부채’는 약 1500만 원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51년 쌀 80㎏은 128원, 금 1g은 16원이었다. 당시 1500만 원은 현재 가치로 약 292억 원에서 431억 원 사이다. 이는 현재 사립대 기준에서 ‘막대한 부채’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2016 사립대학 부채비율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경희대의 부채가 547억 원인 까닭이다.
경희대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신흥무관학교 강탈설은 연이어 제기됐다. 1961년 ‘경향신문’에는 조영식 전 이사장이 신흥대학을 불법협잡으로 강탈했다는 내용이 광고 형식으로 실렸다. 광고에는 “경희대 총장 조영식은 5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신흥무관학교 후신 신흥대학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불법협잡으로 강탈했으며 이시영의 후계자이자 학장이었던 이규창을 축출해 자유당 간부를 재단 이사에 취임시켰다”고 적혔다.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논쟁거리다. 상황이 이렇자 경희대 재학생과 졸업생 등은 신흥무관학교 역사를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18년 12월 경희대 총동문회와 경희대 총학생회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총동문회관 대회의실에서 ‘경희역사교육을 위한 총동문회-총학생회 협약식’을 맺었다. 두 단체는 경희대가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특강을 개최하고 경희역사연구소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희대 이사진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나서는 데도 입을 다물고 있다. 이에 대해 총동문회 관계자는 “신흥무관학교의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각계에서 노력하는데 정작 신흥의 적자라 할 경희대만 침묵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라며 “이제라도 경희대가 신흥대학의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진정한 민족 사학임을 천명해주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