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들도 피해가지 못한 중도 하차…사퇴냐 경질이냐 놓고 구단 vs 감독 갑론을박 벌어지기도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는 김기태 KIA 감독이 지난 5월 16일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KIA 구단은 박흥식 2군 감독을 대행으로 임명했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또 한 명의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중도 퇴진했다. 김기태 전 KIA 감독이다. 5월 16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T와 홈경기에 앞서 김 전 감독은 “이 경기까지만 지휘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스스로 발표했다. 팀을 통합 우승으로 이끈 직후인 2017년 말 3년 총액 20억 원에 재계약했지만, 임기를 1년도 더 남긴 상황에서 자진 사퇴를 결정했다. 김 전 감독이 사퇴하던 시점에 KIA의 성적은 13승 1무 29패로 최하위. 박흥식 2군 감독이 17일 대전 한화전부터 감독 대행으로 KIA 지휘봉을 잡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감독들의 ‘중도 퇴진’
그동안 KBO 리그 역사에선 계약 기간을 1년 이상 남긴 감독이 중도 퇴진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시작은 1986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역대 최연소 프로 사령탑이 된 허구연 전 청보 감독이었다. 야심차게 프로 구단 감독이 됐지만, 성적은 의욕을 따라가지 못했다. 허 전 감독은 그해 5월 11일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6월 18일 다시 지휘봉을 잡았고, 그 후 두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인 8월 6일 다시 퇴진하는 진풍경을 남겼다. 감독 통산 성적은 57경기에서 15승 2무 40패(승률 0.273). 당시 청보가 워낙 약팀이라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허 전 감독 입장에선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성적표다.
과거에는 중도 퇴진이 ‘성적을 내지 못한 감독’이 밟는 수순으로 여겨졌다면, 순위 경쟁이 더 치열해진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팀을 포스트시즌, 더 나아가 한국시리즈까지 이끌고도 이듬해 물러나는 감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은 2009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5년 장기 재계약에 성공하고 2010년부터 2014년까지 팀을 이끌기로 했다. 하지만 계약 첫 해인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에 4전 전패로 패해 준우승한 뒤 돌연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구단은 ‘용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야구계에선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경기력과 패배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선 감독의 모습이 ‘일등주의’를 추구하는 삼성 그룹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이 돌았다.
두산 시절 김경문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두산을 이끌면서 팀 컬러인 ‘화수분 야구’를 정립시켰다. 2007년과 2008년,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도 했다. 다만 2011년이 고비였다. 포스트시즌 단골팀이던 두산이 시즌 중반 7위까지 처졌고, 서서히 구단 수뇌부와 불화설도 불거졌다. 김 감독은 잠실 라이벌인 LG와 5월 5일 어린이날 매치에서 대패한 이후 꾸준히 사퇴 의사를 밝혔고, 결국 그해 6월 13일 자진해서 두산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 감독’의 공백은 길지 않았다. 김 감독은 2개월 만에 NC 초대 감독으로 복귀했고, 1군 진입 2년 만인 2014년 팀을 포스트시즌 무대에 올려 놓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NC는 그 후 2017년까지 4년 연속 가을 야구를 했고, 2016년엔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해냈다. 김 감독은 NC의 역사를 함께한 산 증인이었다.
하지만 2017년 6월 3일 NC는 김경문 감독이 퇴진하고 유영준 단장이 감독대행을 맡아 남은 시즌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최하위로 처져 있던 NC가 이날 마산구장에서 삼성에 3연전 싹쓸이 패배를 당하면서 승률 0.339(20승 39패)까지 떨어진 탓이다. NC는 ‘현장 리더십 교체’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지만, 당시 김 감독이 경질됐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감독 통산 900승에 단 4승만을 남겨 놓은 김 감독이 굳이 그 시점에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수 로건 베렛에 대한 견해차로 구단 수뇌부와 갈등이 심화된 것이 진짜 이유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백전노장’ 김 감독이 떠나고 프로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유 대행이 자리를 채웠다.
#명장들도 피해가지 못한 성적 부진의 악몽
김진욱 전 두산 감독은 2012년 김경문 감독 후임으로 두산 지휘봉을 잡은 뒤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13년엔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했고, 시즌 종료 후 선수들을 이끌고 마무리캠프까지 떠났다. 하지만 “우승할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내부 불만이 계속 터져 나왔다. 결국 감독 교체 시기로는 다소 늦은 11월 26일 경질됐다. 감독이 마무리캠프까지 다녀온 뒤 교체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 당시 여러 의혹이 쏟아졌다. 김진욱 감독은 이후 KT 3대 감독으로 부임해 2년간(2017·2018년) 팀을 이끌기도 했지만, 팀이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자 임기 1년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자진 사퇴’를 택했다.
김기태 감독은 LG 취임 첫해인 2012년 반전의 토대를 닦았다. 2013년엔 마침내 팀을 정규시즌 2위로 이끌었다. ‘가을 야구’라는 LG의 10년 묵은 한을 풀었다. 그러나 11년 만에 치른 포스트시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사퇴해 충격을 안겼다. 2014시즌이 시작되자마자 LG가 최하위로 처지면서 감독의 스트레스가 깊어진 탓이다. 결국 4월 23일 대구 삼성전 더그아웃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경기 종료 후 LG는 김기태 감독의 자진 사퇴를 발표했다. LG는 이후 김 감독을 1군 엔트리에 계속 올려놓은 채 설득에 나섰지만, 그는 아예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공식적으로는 김 감독이 5월 12일까지 LG 지휘봉을 잡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이유다. 김 감독은 이듬해 KIA 사령탑으로 현장에 복귀해 또 다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결국 지휘봉을 잡은 두 팀에서 연속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김성근 전 한화 감독은 사실상 팬들이 지휘봉을 쥐어준 감독이었다. 한화가 ‘우승 청부사’ 김응용 감독 지휘 아래서도 만년 하위권에 머물자, 팬들은 약팀의 기량을 끌어 올리는 데 능력을 발휘해 온 김성근 감독을 ‘모셔 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김 감독은 팬들의 바람대로 한화 사령탑에 올랐다. 하지만 앞선 지도자 생활에서 김 감독을 따라 다녔던 ‘혹사 논란’은 한화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독선적인 리더십과 그로 인한 프런트와의 대립도 여전했다. 그런데도 성적은 위로 올라가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2017년 5월 23일 결국 김 감독과 한화는 결별했다. 이 과정에서도 ‘자진 사퇴’냐, ‘경질’이냐를 놓고 감독과 구단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상처뿐인 동행이었다.
대행을 거쳐 정식 감독에 오른 경험이 있는 김성근 감독은 중도 사퇴로 건강상의 문제와 중도 사퇴로 후임 대행 감독을 탄생 시키기도 했다. 연합뉴스
감독이 임기 도중 자리를 비우거나 팀을 떠나면, 그 자리에 대신 앉아 팀을 지휘할 인물이 필요하다. 그게 ‘감독 대행’의 임무다. 김기태 전 감독의 사퇴와 함께 KBO 리그 역사에는 감독 대행이 또 한 명 추가됐다. 박흥식 감독 대행은 KBO 리그 역대 58번째 감독 대행이다. 감독의 해임 혹은 사퇴로 대행을 맡게 된 사례로만 따지면 역대 40번째다. 이미 조계현 KIA 단장이 “올 시즌 끝까지 박 대행과 함께한다”고 못 박은 상황이라 박 대행은 총 100경기를 지휘할 가능성이 높다. 1995년 쌍방울 김우열 감독대행(102경기)과 2017년 한화 이상군 감독대행(101경기)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많은 경기 수다.
그동안 역대 가장 많은 감독대행이 거쳐 간 팀은 LG(전신 MBC 포함)와 롯데, 현대(전신 삼미-청보-태평양 포함)다. 총 여덟 차례나 감독대행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독 대행을 두지 않았던 팀은 가장 늦게 창단한 막내구단 KT밖에 없다. KT는 1대 조범현 감독이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뒤 2대 김진욱 감독이 부임했고, 김 감독은 지난 시즌 종료 후 사퇴해 3대 이강철 감독이 올 시즌부터 지휘봉을 이어 받았다.
사실 58차례에 달하는 감독 대행 사례 가운데 약 31%(18회)는 감독의 개인 사정에 따른 ‘한시적 대행’이었다. 2016년 5월 한화 김성근 감독이 시즌 도중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게 돼 김광수 수석코치가 15일간 지휘봉을 잡았던 사례와 같다. 2017년 8월 20일 김태형 두산 감독이 게실염(대장벽에 생긴 작은 주머니 안에 장 내용물이 고여 발생하는 염증)으로 입원하면서 한용덕 당시 두산 수석코치가 지휘봉을 잡은 게 가장 마지막 사례다. 김 감독은 치료를 마치고 4일 만인 24일 인천 SK전에 복귀했다.
1997년 백인천 전 삼성 감독도 건강 문제로 두 차례 자리를 비운 적이 있다. 그해 6월 28일 극도의 스트레스에 따른 고혈압과 뇌출혈로 쓰러져 한동안 조창수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국 9월 2일 LG와의 더블헤더 제1경기가 끝난 뒤 병원으로 갔다. 조 대행이 더블헤더 2차전부터 다시 지휘봉을 잡았고, 돌아오지 못한 백 감독 대신 플레이오프까지 선수들을 이끌고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가장 여러 차례 감독 대행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은 유남호 전 KIA 감독이다. 다섯 번이나 감독 대행을 맡아 역대 최다 기록을 남겼다. 주로 ‘코끼리’ 김응용 감독을 대신해 감독석을 지키곤 했다. 다혈질인 김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하면,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9월 4일, 1999년 5월 1일, 2000년 9월 1~3일, 2000년 10월 5일처럼 ‘하루 천하’ 혹은 ‘사흘 천하’로 기록된 날이 네 번이나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대행’ 꼬리표를 떼기 힘든 감독대행의 운명
사실 감독 대행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도 없다. 잘해야 본전이고,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대부분 전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난 뒤 지휘봉을 이어 받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2004년 7월 김성한 감독의 대행으로 나선 유남호 감독 대행은 후반기 26승 18패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위권에 처졌던 KIA를 준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다. 이듬해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2001년 5월 LG 이광은 감독의 바통을 이어 받았던 김성근 감독 대행도 그랬다. 잔여 경기 49승 42패로 승률 5할을 넘기면서 LG에 다음 시즌을 향한 희망을 안겼다. 역시 정식 감독이 돼 이듬해 LG를 한국시리즈에 올려 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드문 사례일 뿐이다. 감독이 시즌 도중 물러날 정도로 바닥으로 처진 팀이다. 정식 감독도 아닌 감독 대행의 지휘 아래 극적인 반등을 이뤄내기란 쉽지 않다. 감독 대행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만한 환경과 권한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전직 프로야구 감독은 “감독 대행 체제에서 팀 성적이 이전보다 상승한다고 해서 감독 대행의 역량으로 갑자기 팀이 달라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전임 감독이 떠나면서 일시적으로 분위기가 전환된 효과가 오히려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역대 감독 대행을 거친 33명 인사 가운데 ‘대행’ 꼬리표를 떼고 감독으로 정식 계약한 인물은 총 14명밖에 없었다. 이재우 ·윤동균(이상 OB), 이희수(한화), 유남호·서정환(이상 KIA), 유백만·천보성·김성근(이상 LG), 이만수(SK), 강병철·김명성·우용득(이상 롯데), 강태정(청보), 김준환(쌍방울) 등이다.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은 2006년 LG에서 이순철 전 감독을 대행해 잔여 시즌을 치른 뒤 2012년 롯데에서 프로야구 감독이 된 케이스다.
한 시즌의 절반 이상을 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대행들도 다르지 않다. 2017년 이상군 한화 감독대행은 101경기를 지휘했고 지난해 유영준 NC 감독대행은 85경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 한화는 한용덕 감독, NC는 이동욱 감독을 각각 선택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대행에서 정식 감독으로…‘바늘 구멍’ 통과한 역대 감독들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처음으로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가 됐다. 감독 대행을 맡았다가 정식 감독으로 연착륙한 첫 사례다. 1983년 7월 박영길 초대감독이 사임하자 대신 지휘봉을 잡았고, 1984년 롯데 2대 감독으로 정식 취임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다. 롯데에서는 이후 같은 사례가 두 번 더 나왔다. 1998년 6월 김용희 감독이 떠나면서 배턴을 이어 받은 김명성 감독 대행이 1999시즌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김명성 감독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다. 결국 2001년 7월 퇴진했고, 그해 끝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명성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받은 우용득 감독 대행은 남은 시즌을 무사히 마치고 이듬해 감독이 됐지만,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2002년 6월 중도 퇴진했다. 두산에서는 이재우 전 감독이 처음으로 대행 출신 감독에 올랐다. 1990년 5월 이광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면서 이재우 감독 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을 치렀고, 시즌 종료 후 이 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이 감독 역시 한 시즌을 못 넘겼다. 이때 감독 대행을 맡은 윤동균 코치 역시 한 달 뒤 차기 감독으로 임명돼 두 시즌을 무사히 이끌었지만, 1994년 9월 선수단 항명 파동에 휘말리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화에서는 이희수 전 감독이 유일한 대행 출신 감독이다. 이 감독은 1998년 7월 강병철 감독 대신 지휘봉을 잡았고, 이듬해 정식 감독에 올랐다. 감독 첫 해인 1999년 한화를 창단 후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스트레스가 문제였다. 그해 중반부터 귀 뒷부분에 종양이 자라기 시작해 이듬해 수술까지 받았다. 2000년 11월 임기를 마친 뒤 재계약을 포기했다. 감독 대행으로서 역대 가장 성적이 좋았던 유남호 대행은 이듬해인 2005년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정작 ‘감독’으로서는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1년도 안 돼 지휘봉을 서정환 감독 대행에게 넘겼다. 서 대행은 역시 3개월간 남은 시즌을 무사히 마친 뒤 그해 10월 유 감독에 이은 KIA 차기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후 2007년까지 2년간 팀을 이끌었다. LG의 전신 MBC는 1987년 7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동엽 감독이 퇴진한 뒤 유백만 코치에게 세 번째 감독 대행을 맡겼다. 유 대행은 그 시즌을 마치고 마침내 정식 감독으로 올라 섰다. 다만 임기는 1988년 한 시즌이 전부였다. 1996년에는 천보성 감독 대행이 7월부터 이광환 감독 대신 팀 지휘를 맡았고, 이듬해부터 1999년까지 3년간 LG를 이끌었다. 김성근 전 감독은 2001년 5월 이광은 전임 감독의 대행을 맡았다가 그해 말 정식 감독으로 계약했다. LG는 김성근 감독 체제였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했지만, 김 감독은 구단과 불화로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SK는 2011년 8월 김성근 감독이 퇴진하자 이만수 수석코치에게 감독 대행을 맡겨 시즌을 마쳤다. 이만수 대행은 이듬해부터 정식 감독이 돼 3년간 SK를 이끌었다. 삼성은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감독 대행을 감독에 앉힌 적이 없다. 1983년 5월 재일교포 이충남에게 서영무 초대 감독의 대행을 맡긴 뒤 내심 차기 감독으로도 고려했던 게 전부다. 그러나 당시 국민 정서상 대구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끝내 무산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