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셀프 불출마로 물갈이 명분 확보…황교안, 중도 외연 확장에 명운 달려
4·19혁명 제59주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 임준선 기자
이해찬·황교안 대표는 여의도의 뜨거운 감자다. 평가도 극과 극이다. 이 대표는 ‘최고의 선거 전략가’부터 ‘꼰대 정치인’ 등으로 불린다. 당내 일각에선 “이 대표는 참모 스타일이지, 선거 지휘자는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2012년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였던 그는 선거 막판 ‘2선 후퇴론’에 시달렸다. 정권 탈환에도 실패했다.
황 대표는 ‘보수의 투사·구원투수’부터 ‘제2의 반기문’ 등으로 평가받는다. 황교안 체제 이후 한국당 지지율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지만, 황 대표가 ‘총선 승리→대선 직행’의 길을 갈지는 미지수다. 당 안팎에선 회의론이 여전하다. 최고 권좌에 오른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길을 좇지만, 두 번이나 낙마한 이회창의 길을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굿바이 황교안’의 길이 펼쳐진다. 이 대표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지면 ‘굿바이 이해찬’이다. 다른 출구전략은 없다.
이 대표 승부처는 ‘셀프 불출마’다. 20대 국회 최다선(7선)인 그는 지난해 8·25 전당대회 당시부터 ‘총선 불출마’를 앞세워 당심과 민심을 파고들었다. 당권을 잡은 직후 이 대표는 2022년 재집권을 핵심으로 하는 20년 장기 집권론에 시동을 걸었다. 이후 이해찬 발 장기 집권론은 ‘50년→100년’으로 확대됐다. 야당은 그때마다 “과대망상이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투사형인 이 대표도 물러서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장기 집권론을 꺼내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이 대표의 총선 구상은 간단하다”며 “셀프 불출마를 명분 삼아 중진 물갈이를 하겠다는 것 아니겠냐”라고 밝혔다. 이른바 ‘권노갑 모델’이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은 국민의정부 시절인 2000년 16대 총선에서 셀프 불출마를 고리로 수도권·호남 중진 물갈이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호남 현역 의원 17명 가운데 10명이 공천을 받지 못했다. 60% 가까이 물갈이를 한 셈이다.
동교동계 전직 의원은 “당시 권 상임고문이 중진급 의원을 일일이 만나 (불출마를) 설득한 것은 유명한 일화”라고 말했다. 불쏘시개를 자처한 ‘권노갑 효과’는 컸다. 권 상임고문의 셀프 불출마는 당 물갈이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내부 주도권은 당 주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 당 총재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직접 맡았다. 개혁 공천은 집권 3년 차 증후군에 시달리던 정권의 레임덕(권력누수)까지 늦추는 효과를 안겨줬다. 국민의정부는 집권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에 직격탄을 맞았다. 정권 곳곳에서 ‘레임덕(권력누수) 징후’가 나타났다.
다만 권 상임고문의 셀프 불출마에도 최종 결과는 여당의 석패(한나라당 133석 대 새천년민주당 115석)였다. 이회창 대세론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당시 총재를 전국구 1번으로 전진 배치, DJ와 정면 승부를 펼쳤다. DJ는 권 상임고문 중심의 공천개혁과 함께 1998년 흡수 통합한 국민신당의 쌍두마차였던 ‘이인제 전면배치’를 승부수로 띄웠다. 호남과 충청을 묶는 DJP(김대중·김종필) 효과를 노린 승부수였다.
당 주류가 뒤로 빠지고 외연 확장이 가능한 인물을 전진 배치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민주당 역시 이 대표를 비롯해 구주류인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직계 대신 이낙연 국무총리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새 영입인사 등이 ‘신 어벤져스’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비주류의 반란으로 끝난 당 원내대표 경선이 이를 증명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인영 원내대표 선출은 이 대표에 대한 비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정가에는 그 이전부터 ‘이해찬 후방 배치설’이 떠돌았다. 이 총리를 전진 배치하는 ‘이낙연 선거대책위원장설’, ‘이낙연·임종석 서울 종로 출마설’, ‘조국 부산·경남·울산(PK) 차출설’ 등도 이 지점과 맞닿아있다. 16대 총선에서 여당이 남북 정상회담 일정이 조기에 공개되면서 되레 보수 결집에 역풍을 맞은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해 6·13 지방선거 전날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집권 4년 차 때는 반대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DJP 정권이 분열한 것도 변수였다. 당시 JP는 내각제 개헌 무산에 반발, 16대 총선 직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충청권 11곳과 경기도 1곳 등 12곳을 당선시키면서 제3당으로 우뚝 섰다. 이 지점은 좁게는 민주당과 민주평화당 간 통합, 넓게는 범 진보연대와 맞물려있다.
결과만 보면, 권노갑 승부수는 실패였다. 하지만 16대 총선 선거 출구조사는 민주당을 제1당으로 예측했다. 봉화·울진에 출마한 김중권 후보의 19표 차 패배 등 초박빙 지역 11곳 중 10곳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간 게 결정적 패인의 원인이다. 이해찬 호를 16대 총선에 대입하면, ▲공천 물갈이를 둘러싼 원심력 제어 ▲새로운 인물 영입 효과 ▲구주류의 2선 후퇴 ▲범진보연대 ▲보수 역풍 변수 차단 등에 따라 정치적 운명이 갈릴 전망이다.
이 대표가 투사형이라면, 황 대표는 ‘미스터 국보법(국가보안법)’으로 통한다. 그는 침례교단의 전도사이자, 공안검사 출신이다. 법치주의 등 원칙을 중시한다. 한때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평가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이유다. 다만 그의 정치 입문은 박 전 대통령보다 ‘이회창 모델‘과 유사하다. 둘 다 율사 출신이다. 비영남(황교안 서울·이회창 충청)이다. 경기고 동문이다. 내각 2인자인 국무총리를 지냈다.
차이점도 있다. 문민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이 전 총재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상도동계 2인자였던 최형우 당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면전에서 호통을 칠 정도였다. 국무총리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제외 문제를 놓고 YS와 충돌한 이 전 총재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진 사퇴했다.
보수진영 관계자는 “이 전 총재는 대쪽이라면, 황 전 대표는 안정파에 가깝다”고 귀띔했다. 황 대표가 ‘이회창식 공천 물갈이’를 단행할 강단이 있을지 미지수라는 얘기다. 이 전 총재는 16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경북(TK) 대부’로 불린 김윤환 전 의원을 비롯한 민정계를 단번에 숙청했다. 김 전 의원 등 민정계는 1997년 대선 당시 병역 비리로 한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 전 총재를 본선 링에 오르게 한 일등 공신이다. 다만 최근 황 대표도 보수 투사로 변신, 보수 혁신을 기치로 물갈이에 나설 수도 있다.
대세론을 탄 이 전 총재의 공천 칼자루는 배신이 아닌 ‘보수 혁신’으로 치환했다. 황 대표도 2·27 전당대회에서 도와준 친박(친박근혜)계와의 관계 설정이 21대 총선 길목의 첫 시험대라는 얘기다. 황 대표의 단기적 목표는 2004년(17대)과 2012년(19대) 총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모델’ 재연이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던 박 전 대통령은 두 번의 총선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보수진영을 기사회생시켰다. 탄핵 역풍을 맞았던 17대 총선에선 천막 당사 승부수를 던졌다. 보수 혁신 의지를 드러내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참패 우려를 딛고 121석을 건졌다. 19대 총선에선 박근혜 키즈 등 새 인물 영입으로 과반(152석)을 획득하고 대권 열차에 탑승했다. 황 대표의 운명이 ‘구주류와의 단절’ 및 인재영입을 통한 ‘중도외연 확장’에 달린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