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보건기구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록...각종 정부 제재받는 국내 게임업계의 이중고
5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내우(內憂)를 이겨내느라 바쁜 한국 게임산업에 외환(外患)이 닥쳤다. 국제보건기구(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한 까닭이다.
5월 25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선 ‘제72차 WHO 총회’가 열렸다. 이날 WHO 총회는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WHO는 28일 게임이용장애가 포함된 ‘제11차 국제질병분류개정안’을 최종 의결했다.
정신·행동·신경발달 장애 영역으로 분류된 게임이용장애의 질병코드는 ‘6C51’이다. WHO는 게임이용장애를 ‘게임을 일상생활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에도 12개월 이상 게임을 지속하는 경우’라고 정의했다.
국제질병분류개정안은 1990년 10차 개정안이 발효된 이후 30년 만에 개정 작업을 거쳤다. 개정안은 2022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WHO 회원국에 적용된다. 우리나라는 2025년 통계청에서 5년마다 발표하는 한국표준질병인사분류(KCD)에 ‘11차 국제질병분류개정안’ 주요 내용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게임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그간 국내 게임업계는 ‘온라인 게임 결제한도 지정’, ‘셧다운제’ 등 각종 정부 제재로 성장세가 더디다. 이런 상황에서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취급했다. 게임업계에겐 대형 악재가 발생한 셈이다. 그간 ‘수출효자’라 불리던 국내 게임산업은 직접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록 관련 국내 게임업계의 반응은 ‘망연자실’이다.
게임업계 일각에선 “WHO 국제질병분류 개정으로 ‘게임은 질병’이란 인식이 굳어질 수 있다. 특히 국내 게임시장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게임시장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 국내게임업계 관계자는 “최근 국내 게임산업은 하향세에 접어 들었다. 많은 기업이 만족스럽지 못한 실적을 내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다. 게임시장은 더욱 활기를 잃을 수 있다. 게임산업 종사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 볼 만하다”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게임산업 관계자는 “게임 산업의 성장 동력이 사실상 멈춘 셈”이라면서 “게임 업계가 정부 제재나 국제기구 조치에 대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쉽지 않다”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게임 기업들이 자체 캠페인을 통해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캠페인이 ‘게임을 사회악 일종으로 규정하는 대세’를 뒤집긴 역부족일 것이라 본다”고 주장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우려하는 상황은 구체적인 연구 결과로 입증되기도 했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은 ‘게임 과몰입 정책변화에 따른 게임산업의 경제적 효과 추정보고서’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이덕주 교수 연구팀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된 보고서다. 보고서는 “게임이용장애가 질병코드로 등록될 경우 2023년부터 2025년까지 국내 게임시장 매출 손실이 11조원 이상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보건기구(WHO) 본부. 사진=연합뉴스
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하자, 정부 부처별 입장 또한 엇갈리는 양상이다. 5월 26일 보건복지부는 ‘게임이용장애 민·관 협의체’ 추진을 발표했다. 민·관 협의체는 WHO 의결 내용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논의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될 전망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민·관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문체부는 ‘게임산업 위축’을 우려하는 입장이다.
문체부는 2019년 게임산업 관련 예산으로 612억 원을 책정하는 등 게임산업 발전에 적지 않은 공력을 쏟았다. 문체부는 2019년 중점 과제로 ‘게임 인식 개선’을 선정하기도 했다. 문체부로선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한 WHO의 결정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한편 5월 29일 한국게임산업협회, 한국모바일산업연합회, 한국게임개발자협회 등 게임 관련 주요 단체들은 국회에서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 이날 공동대책위원회는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록을 반대하고, 국내 도입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동대책위원회는 “게임은 ‘4차산업혁명’이란 미래를 여는 창이다. 5천년 역사에서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혁신의 산물이기도 하다”며 게임의 가치를 역설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게임자유선언 낭독’을 통해 “19세기 소설, 20세기 TV가 그랬던 것처럼 기성세대가 게임을 현대판 마녀로 만들고 있다”며 한국 사회에서 저평가받는 게임의 입지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게임 중독은 질병”이라는 WHO 결정에 국내 게임업계는 요동치고 있다. 격랑에 빠진 국내 게임업계는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기 힘든 처지에 놓였다. 게임업계는 지속해서 “WHO의 국제질병분류 개정을 재고해 달라”는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줄곧 세계 게임산업 트렌드를 이끌어 왔다. 온라인 게임, e스포츠 등 혁신적인 게임문화는 한국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 국내 게임산업은 국내·외적으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게임 강국’ 한국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