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양성 암호화폐 규제’에 대기업 같은 방향으로…IT 기업은 해외 계열사 활용해 관련 분야 진출
암호화폐 시장이 회복기에 들어선 조짐을 보이자, 국내 기업들도 새삼 암호화폐 시장에 눈을 돌리는 모양새다. 사진은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원블록스’. 고성준 기자
“페이스북의 ‘리브라’에 비자, 우버, 이베이 등 각 산업 리더들이 이해관계자로 참여함으로써 블록체인 기술 대중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피델리티, JP모건 등 제도권 금융사들의 진출 소식 또한 암호화폐 상승에 영향을 줬다.”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원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최근의 암호화폐 시장의 회복세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블록체인 사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암호화폐에는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4차산업 핵심기술로 블록체인을 꼽으며 양성 의지를 보인 반면,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규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탓이 큰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암호화폐가 자금세탁 및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 금융위원회는 오는 7월 9일 만료되는 ‘가상통화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을 1년 연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가 공전하는 상황에서 관련 법인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법제화가 신속하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국내 대기업들은 SI(시스템통합) 계열사를 활용해 블록체인 사업을 확대하면서도 암호화폐에는 선을 긋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블록체인 사업은 양성하되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투기’로 규정하며 제재하고 있어 기업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사업바운더리 측면을 검토해 암호화폐보다 블록체인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라면서도 “물론 규제로 인해 대기업들의 암호화폐 사업 진출이 어렵다는 시각도 설득력 있다”고 전했다.
삼성그룹 IT계열사 삼성SDS는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보험금 자동청구 서비스’를 오는 8월 말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서비스는 의료기관과 보험사,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기업과 컨소시엄을 통해 구축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다. 다만 삼성SDS는 “기업형 블록체인에 집중하고 있다”며 “암호화폐 활용에 대해서는 검토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자체 암호화폐인 ‘삼성코인’을 발행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지난 2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10 공개는 국내 암호화폐 시장 회복에 한몫을 했다. 삼성전자가 갤럭시S10에 암호화폐 지갑 기능(블록체인 월렛)을 탑재하면서 암호화폐 사용 대중화 기대가 높아진 것.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1월 신설한 블록체인 TF팀이 이미 메인넷(독립적인 블록체인 생태계를 구성하는 메인 네트워크)과 자체 가상화폐를 개발하고 시범운영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코인은 전혀 들어본 바 없다”고 일축했다.
LG그룹의 LG CNS도 블록체인 사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LG CNS는 지난해 5월 블록체인 플랫폼 ‘모나체인’을 출시하고 ‘마곡 커뮤니티화폐(마곡페이)’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 1월에는 관련 사업을 위해 KB금융그룹과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LG CNS도 ‘토큰(대용화폐)’을 강조하며 암호화폐와 거리를 뒀다. 지난 19일 ‘TECH DAY 2019’ 행사에서 김기영 LG CNS 블록체인사업팀 단장은 “마곡 전자화폐를 스테이블 토큰으로 만들었다”며 “변동성이 큰 가상화폐보다 디지털 자산의 토큰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암호화폐 사업을 부인하고 있다면, IT기업들은 해외 계열사를 활용하고 있다. 한 IT기업 관계자는 “국내 지주사가 아닌 해외 법인이 암호화폐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규제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다”고 전했다. IT기업들은 해외 법인을 활용해 암호화폐 사업에 진입, 아시아를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카카오는 지난해 일본에 블록체인 전문 지주회사 ‘카카오G’와 개발회사 ‘그라운드X’를 설립했고, 싱가포르에 특수목적법인 ‘클레이튼’을 설립해 투자금을 유치했다. 카카오는 그라운드X를 통해 오는 27일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을 출시하고, 자체 코인 ‘클레이’를 발행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카카오가 일본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국내에서도 카카오톡 메신저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카카오코인’을 출시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카카오 일본 자회사 ‘그라운드X’ 한재선 대표가 카카오의 국내 자회사 ‘그라운드원’의 대표를 겸하고 있는데다,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톡 플랫폼 등이 암호화폐와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 카카오가 이용자들이 카카오의 플랫폼을 이용하고 얻는 가상화폐 ‘카카오코인’으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구입하거나 멜론 음원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상도 나왔다. 카카오 관계자는 “지난해 상반기 그라운드X를 설립하고 이후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활용 방안 등을 다방면으로 고려하고 있다”면서도 “클레이 외 ‘카카오코인’ 발행은 시장의 추정일 뿐 고려한 바 없다”고 전했다.
네이버도 일본 자회사 라인을 통해 블록체인·암호화폐 사업에 진출했다. 라인은 지난해 4월 블록체인 전문 업체인 ‘언블락’을 설립해 블록체인 플랫폼 ‘링크체인’을 운영하고 암호화폐 ‘링크’를 발행했다. 또 지난해 9월 싱가포르 소재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박스’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라인 관계자는 “링크는 비트박스에서 거래되는 중이지만, ICO(가상화폐공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