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투자자들 ISD 제소 가능성…설비 교체 제때 안해 안전사고 우려도
고성 산불 최초 발화지점 인근 도로에 한국전력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준필 기자
한전 주주들이 김종갑 한전 사장 등 이사진을 배임죄로 고발했다. 한전은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 12조 원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작년엔 1조 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2016년 6만 원대까지 치솟았던 주가도 현재는 2만 원대로 폭락했다.
한전 측은 발전용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외부 요인이 경영악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주주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탈원전 정책이 가장 큰 문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주주들은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릴레이 시위도 시작했다.
한전 자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노조 관계자도 “탈원전 정책과 경영악화가 관련 없다는 주장은 후안무치하다”고 일갈했다.
관계자는 “한전은 쉽게 말해 전기 중개상이다. 얼마나 전기를 싸게 사서 공급하느냐에 따라 경영성과가 달라진다. 최근 경영악화는 한전이 발전단가가 가장 싼 원전 대신 LNG로 생산된 전기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LNG로 생산되는 전기는 원전으로 생산되는 전기보다 약 2배나 비싸다”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 특별한 문제도 없는데 툭하면 안전 점검한다고 원전을 세웠다. 원전 가동률이 한때 50% 대까지 떨어졌다. 이게 탈원전 정책 일환이 아니면 뭐냐. 원전 가동률을 과거 정부만큼만 유지했으면 이렇게 심각한 적자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 관계자는 “원전에 비해 LNG는 발전 단가가 2배지만 신재생에너지는 3배다. 문재인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늘리겠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한전 적자폭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탈원전 정책으로 한전이 더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일부 원전 건설을 중단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천억 원의 손해가 발생했다. 공사 중단에 따른 손해는 한전 자회사인 한수원이 부담했다.
한전은 올해 1분기에만 6299억 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적자폭이 커지는 와중에 한전 이사회는 정부 요구에 따라 여름철 주택용 전기요금을 감면해주는 누진제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한전이 입게 될 손실은 매년 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요금 할인에 따른 손실은 정부가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해에도 똑같은 약속을 했다가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아 지키지 못했다. 지난해 누진세 완화로 인한 손실액은 약 3600억 원이었는데 예산이 전액 삭감돼 한전은 정부로부터 350억 원만 지급 받았다.
한전이 최근 전남 나주에 건립하고 있는 한전공대도 논란거리다. 학교 건립을 위해 약 7000억 원이 투입된다. 전남도와 나주시가 총 2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지만 그 외 비용은 한전이 부담해야 한다. 학교가 건립되고 나면 매년 운영비로 600억 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 운영은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라 한전이 막대한 적자를 떠안을 수도 있다.
한전공대 건립은 문재인 대통령 선거공약이었다. 주주들은 손실이 뻔히 예상됨에도 한전이 무리하게 학교를 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역시 배임에 해당된다는 주장이다.
한전 주주 모임 장병천 회장은 “아무리 공기업이라고 해도 주식회사는 주주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지 않나.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너무 과도한 지원으로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면서 “최근 강원랜드 전 이사진은 태백 오투리조트에 150억 원을 기부했다가 배임죄에 걸려 약 60억 원을 변상하라는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고 했다.
한전 주주들은 이사회를 배임죄로 고발하면서 평창동계올림픽에 800억 원을 지원한 행위도 문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공기업이 열린 마음으로 평창올림픽에 출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전이 사실상 외부 압력에 의해 지원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장병천 회장은 “일반 기업이야 올림픽에 후원을 하면 광고효과라도 얻을 수 있지만 광고가 필요 없는 한전은 얻을 게 없다. 강압에 의해 불필요한 후원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회장은 “소송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신 분들이 많다. 한 70대 투자자는 한전이 망할 리도 없고 배당금도 나오니까 퇴직금을 전부 넣었다가 주식이 폭락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면서 “이번 소송을 통해 이런 분들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했다.
한전 적자 폭이 커지면서 국내 주주뿐만 아니라 해외 주주들이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ISD(투자자-국가소송제)를 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ISD는 해외투자자가 상대국의 법령·정책 등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한전은 뉴욕 증시에도 상장되어 있고 외국인이 소유한 지분이 30%에 달한다.
법조계에선 누진제 완화, 원전 가동률 하락 등으로 발생한 손실은 정부 정책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해외 주주들이 ISD로 걸면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한전이 패소하면 막대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될 수도 있다.
한전 측은 지난 4월 ‘임원 배상 책임보험’을 갱신하면서 보상한도를 기존 500억 원에서 1000억 원으로 올렸다. 임원 배상 책임 보험은 임원이 주주 등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 경우, 이를 대신 보전해 주는 상품이다. 또 한전은 최근 법무법인 2곳에 전기요금을 할인해 주는 누진제 개편안이 배임에 해당되는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한전 경영진들도 현재 경영 행태가 배임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
경영이 악화되자 한전 측은 전기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김종갑 한전 사장은 최근 “콩(원료)보다 두부(전기)가 싸다”며 전기요금 인상 당위성을 설명했다. 한전 경영악화로 인한 피해가 주주들을 넘어 일반 국민들에게도 전가되는 모양새다. 전기요금 개편안으로 인한 요금 인상분은 내년 총선 이후부터 반영될 예정이다. 이 와중에 내년 총선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전은 경영이 악화되자 안전 관련 예산을 줄이려 한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지난 4월 발생한 강원도 산불은 개폐기에 연결된 전선에서 발생한 불꽃이 발화점으로 추정된다. 야권은 “경영 악화로 한전이 개폐기 등을 제때 교체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실을 통해 일요신문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한전은 2016년 개폐기 1만 1846대를 교체했지만 지난 2018년엔 7254대를 교체하는데 그쳤다.
이에 대해 한전은 안전과 직접 관련된 예산은 영업이익 적자 여부와 관계없이 줄이지 않고 설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설비교체 예산은 일부 줄었지만 안전점검 예산이 오히려 늘어나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정유섭 의원실 관계자는 “차를 오래 타면 원래 정비비가 많이 들지 않나. 차량을 교체해야 하는 시기에 교체 안하면 아무리 열심히 정비를 해도 사고 위험이 커진다. 설비 교체비 줄이고 점검 예산만 늘려놓고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