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네트워크 활용해서 ‘전경련 패싱’ 탈출할 기회?…전경련의 기회일까 위기일까
일본의 발표 후 정·재계는 대책 마련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로의 의견에 온도차가 있지만 이번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0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계 주요 인사 34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기업인들이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단기적 조치, 장기적 조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단기적 조치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또한 해당 부처와 긴밀한 협의를 해나가고 있다며 사태 장기화에 따른 정부와 기업 간 협력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해 정·재계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전경련의 최근 행보가 눈에 띈다. 사진=고성준 기자
이렇듯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다. 지난 10일 전경련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일본 경제 제재의 영향 및 해법’ 긴급세미나를 개최했다. 전경련은 경제 단체인 만큼 이번 사안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주목이 가는 부분은 세미나에서 나온 발언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정인교 인하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일 통상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치적 관리체계가 깨졌기 때문”이라며 “정치·외교적 실패로 발생한 문제를 통상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맞대응 확전 전략은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식 대응에 지나지 않아 대화 의제를 발굴해 한·일정상회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는 패널의 발언일 뿐, 전경련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 토론에서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맞대응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이날 “기업의 신용강등이나 성장률 저하에 이르기 전에 한·일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피해가 발생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도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1일 정책조정회의에서 “전경련 토론회에서 정치·외교 실패가 원인, 보여주기 식 대응 등의 어처구니없는 발언들이 주요하게 소개됐는데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엄중한 경제·외교 현장에서 이러한 발언들은 정부의 외교협상력과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발언들”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엉뚱하게 전경련과 여당의 갈등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전경련회관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전경련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전경련 패싱’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도 전경련은 초청받지 못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GS그룹 회장 자격으로만 참석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이 CJ그룹 회장임에도 경총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것과 비교되는 행보다.
지난 3월,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청와대를 찾았을 때 허창수 회장이 환영만찬에 초청 받아 정부가 전경련에 화해의 신호를 보낸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청와대는 “기업과의 관계와 소통에서 전경련의 필요성을 특별히 느끼지 못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에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한국의 최저임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확대간부회의에서 “전경련은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쓰지 않는 지표를 활용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개념으로 나라마다 노동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왜곡될 수 있다”며 “2년 전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전경련의 기지개를 펴는 듯 한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전경련은 현 정부에서 ‘투명 단체’ 취급을 받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전경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전경련이 일본과의 네트워크가 강해 활용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전경련은 지난 1일 ‘2019년 K-Move 스쿨 일본취업연수 발대식’을 개최했고, 오는 22일에는 ‘2019 한중일 기업가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또 오는 11월 일본 도쿄에서 전경련과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가 한일 재계 회의를 개최한다.
전경련도 대일관계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하길 내심 바라는 듯하다. 배상근 전경련 전무는 지난 1일 논평을 통해 “양국 정부는 선린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미래 공동번영을 위해 조속히 갈등 봉합에 나서주기를 촉구한다”며 “우리 경제계도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양국 경제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정부와 전경련의 협력은커녕 관계만 악화되고 있다. 전경련을 탈퇴한 4대그룹(삼성·현대차·SK·LG)도 정부의 외면을 받는 한 재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4대그룹이 탈퇴한 후 전경련의 회비 수익이 급감해 전경련 재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전경련과 정부의 관계 개선은 전경련의 생존과도 연결된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의 의지가 없는 이상 전경련이 자생적으로 살아나긴 쉽지 않아 보인다”고 전했다.
전경련에게 기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난 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일본의 경제보복 관련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권태신 부회장을 초청하는 등 전경련과 정치권의 끈은 남아 있다. 앞서 지난 4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만나고 싶다”며 “민주노총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경총, 전경련 등 경제단체나 노동단체를 이제 만나려고 한다”고 전경련을 언급한 것도 눈에 띈다.
이번 일본 수출 규제 사태에서 전경련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과거의 위상을 약간이나마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전경련이 기회를 받을 가능성조차 높지 않아 보이는 게 현실이다. 전경련이 과거와 같은 재계 맏형 노릇을 할 수 있을지는 정치권과 어떤 식으로 대화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한 국내 반도체 업계의 미래는?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대상에 반도체 제품이 포함됨에 따라 국내 반도체 업계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국내 대표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회사들이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매출은 166조 원, SK하이닉스의 매출은 40조 원에 달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리지스트와 고순도불화수소는 일본 외에 다른 국가에서 수입이 가능해 수입 거래선 일부를 국내로 돌리는 방식 등으로 생산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안다”며 “품질이나 기술력이 뛰어나 그간 일본산을 써왔지만 국내에서도 생산을 할 수 있는 업체가 꽤 있다”고 전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리지스트의 경우 여러 종류가 있는데 당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정상적으로 수입이 가능하고 첨단 리지스트인 ‘포토리지스트’가 규제 대상이다”라며 “당장의 생산 차질은 없고 앞으로도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의 업계 관계자는 “포토리지스트의 경우 극자외선(EUV) 기술 공정에 쓰이는데 당장 국내 메모리 회사들이 공정에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최근 중국 반도체 업체가 무섭게 추격하는 상황에서 기술 격차를 벌리려면 EUV 공정을 언젠가 도입해야 하는데 포토리지스트 수입이 규제되면 이 부분을 풀어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
수출 규제는 대북반출때문?…극단으로 치닫는 한일관계 일본 정부는 수출 규제 조치의 배경으로 고순도불화수소 등 전략물자의 대북반출 의혹을 제기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BS후지TV에서 “한국이 대북 제재를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5일,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한국에 수출한 불화수소의 행방이 묘연해 졌는데 화학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불화수소가 북한에 갔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장관은 9일 “북한을 포함한 UN 결의 제재 대상국으로 유출됐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10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산업부 조사 결과 의혹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일본의 행위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보복을 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대북반출을 일본이 직접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안전보장무역정센터(CISTEC)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오히려 일본이 북한에 불화수소를 밀수출하다가 적발됐다고 보고해 파장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 의원이 CISTEC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약 20년 간 30건이 넘는 대북밀수출사건이 발생했다. 이 중에는 일본이 핵개발이나 생화학무기에 활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가 포함돼 있었다. 진실이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이처럼 북한 문제까지 언급되면서 한일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정치권의 행보에 대해 재계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향후 어떤 식으로 바뀔지도 모르는데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