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 잘해도 1번 소홀하면 지적”…김선빈·이승엽·류현진도 사인 때문에 비난 시달려
‘야구의 날’ 을 맞아 열린 팬사인회에 선수협 이대호 회장이 불참해 논란이 일었다. 사진은 지난해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어린이 팬과 사진을 찍는 이대호. 박정훈 기자
[일요신문] 8월 23일 ‘야구의 날’을 맞아 전국 5개 구장에서 펼쳐진 팬 사인회를 두고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가 집중 포화를 맞았다. 행사를 앞두고 KBO가 사인회에 참석할 선수를 선정해서 구단에 요청했는데 다른 구단은 대부분 KBO의 요청대로 팀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사인회에 참석한 반면 유독 롯데 자이언츠만 요청했던 선수들 대신 신인 서준원(1차 지명), 고승민(2차 1라운더)을 팬 사인회에 내보냈던 것. 원래 KBO가 이름을 올린 롯데 선수는 이대호, 손아섭이었다. 손아섭은 허리 부상으로 재활군에 있어 합류하기 어려웠다고 해도 1군에 있는 이대호 대신 신인 선수를 내보낸 건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선수협 회장이자 몸값 150억 원의 주인공인 이대호의 팬 사인회 불참을 두고 팬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렇듯 프로야구에서는 오랫동안 팬 서비스, 특히 사인 관련된 논란이 자주 불거졌다. 팬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사인을 거부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바람에 상처받는 팬들이 존재한다는 지적에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선수들도 할 말은 있다. 10번 잘하다가도 1번 소홀히 하면 인성이 나쁜 선수로 지적받는다며 서운함을 토로한다.
최근 팬 서비스 관련해서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이가 KIA 타이거즈 김선빈이었다. 김선빈은 평소 팬 서비스에 소홀했던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선빈이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 지하 주차장에서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이 팬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면서 팬들의 공분을 샀고, 그 논란은 시즌 내내 계속됐다.
김선빈은 팬들의 비난을 의식하면서도 일부러 말을 아꼈다. 어떠한 설명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설명 대신 행동으로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지난 8월 18일에는 자신의 1000경기 출전을 기념해 팬들에게 음료수 1000잔을 쏘기로 하고선,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 입장하는 팬들을 위해 직접 음료를 나눠주기도 했다. 유민상, 박준표 등 동료 선수들과 함께 팬 사인회에도 적극 나섰다. 김선빈이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고 해서 사인 논란이 가라앉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침묵 대신 팬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정해야 한다는 게 야구계의 중론이다.
사인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선수 중 한 명은 은퇴해서도 욕을 먹었던 레전드 이승엽이었다. KBO 홍보대사이기도 한 이승엽은 수년 전 한 인터뷰에서 “사인을 많이 하다 보면 그 희소성이 조금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이 은퇴 후에도 그를 옥죄었다. 이승엽과 관련된 기사는 기사 내용보다 그의 이전 사인 관련 인터뷰 내용이 재언급되면서 비난의 성토장이 되곤 했던 것.
이승엽은 최근 각 프로팀 2군 구장을 돌며 후배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셀프 디스’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누구보다 많은 사인을 했고 팬 서비스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자신의 말 한마디로 역풍을 맞았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던 것. 이승엽은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셀프 디스’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승엽은 2군 후배들에게 “내가 한 인터뷰였고, 내가 감수해야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더 신중하게 인터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0년 동안 열심히 야구했는데 팬들과의 스킨십에 더 노력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이승엽 KBO 홍보대사 또한 사인 관련 논란을 겪었다. 한 청소년 대상 행사에서 사인회를 연 모습. 박은숙 기자
이승엽은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사인 거절 논란에 대해 진심으로 자세를 낮췄다.
“수많은 사인들을 반복하다가 우연히 내 사인이 팔리는 걸 알게 됐다. 마침 인터뷰에서 사인 관련 질문이 나와 희소성 운운했던 건데 그 말이 이토록 오랫동안 비난을 받을 줄 몰랐다. 어떤 의도였든 내가 내뱉은 말이라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앞으로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 싶다.”
LA 다저스 류현진도 사인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2013년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찍힌 동영상 때문이었다. 당시 팀을 이끌던 돈 매팅리 감독과 클레이튼 커쇼가 훈련을 마치고 양쪽에서 사인을 하고 있는 가운데 류현진이 팬들을 뒤로한 채 클럽하우스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영상을 통해 노출된 것이다. 이후 류현진은 사인 거부 논란에 휘말렸고, 어깨 수술과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동안 팬들의 비난은 더 가중됐다.
류현진은 스프링캠프가 열릴 때마다 다른 선수들 못지않게 팬들의 사인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팬들의 사인 요청을 뒤로하고 클럽하우스로 뛰어 들어간 영상은 당시 실내 훈련 프로그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사정을 알 수 없는 팬들 입장에서는 영상을 통해 류현진의 인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
류현진의 사인 거절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류현진은 포털사이트에 게재하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사인 거절 관련해서 자세한 입장을 표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류현진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며 누구보다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실제로 시간 될 때마다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터라 영상 하나로 자신의 팬 서비스가 지적을 받는 게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여전히 야구장에서는 물론 야구장 밖에서 만나는 팬들한테도 사인을 이어나갔다. 식당, 미용실, 커피숍, 아이스크림 가게 등 자신에게 사진 촬영,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의 부탁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는 올 시즌, 류현진을 향해 팬 서비스 관련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류현진도 수년 전의 사인 거절 논란을 통해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했고, 팬들도 류현진의 성적과 그동안 팬들에게 보인 류현진의 진정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KIA 타이거즈의 서재응 코치는 팬 서비스 관련해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나타냈다.
“프로 선수한테 팬의 존재는 굉장히 소중하다. 팬이 있어야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들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다. 광주 홈구장의 지하 선수단 주차장까지 들어와서 사인을 요구하고, 그 장면을 촬영하는 팬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우리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팬들도 선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선수는 한 사람이고 그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이는 다수다.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인을 해줘도 받지 못하는 팬들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럼에도 선수들은 팬들에게 진성성 있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SK 와이번스는 야구도 1등이지만 팬 서비스도 10개 팀 중 1등이다. 염경엽 감독을 비롯해 모든 선수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팬들 앞에 나선다.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구단과 감독, 선수들 덕분에 SK 팬들은 “팬 되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는 말로 자부심을 전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