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공포에 떤 여성들, 범인으로 몰렸던 남성들…“이춘재 가족, 피해자 발견 야산에 지어진 아파트 거주”
왼쪽 원이 8차 사건 희생자가 살던 곳이자 이춘재가 살았던 마을이다. 현재는 원룸촌이 들어섰다. 오른쪽 원의 아파트는 6차 사건이 벌어진 야산이었다. 사진=최준필 기자
“이제 못 알아보지. 그땐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어. 원룸촌 있는 저기가 다 논밭이었다고. 다 바뀌었지 뭐.”
1호선 지하철역 병점역 앞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여성 A 씨가 길 건너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1986년 27세로 당시 화성군이었던 이곳에 시집왔다. 벌써 30년도 훌쩍 넘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시집왔을 때 공포 서린 기억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그땐 비오는 날 빨간 옷 입으면 다 죽는다 그랬어.”
하지만 실제 범인은 비오는 날, 마른 날, 흐린 날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 시간, 날씨, 입은 옷,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밤에 밖엔 못 돌아다녔겠다’는 말에 A 씨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A 씨는 “밤은 무슨, 낮에도 장 보러 혼자 가지 못 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범행 대상이었던 여자에겐 그 시절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덧붙였다.
“이젠 다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아서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있어도 말하지도 않을 거야. 뭐 좋은 일이라고.”
A 씨가 시집 온 1986년, 여성들에게 화성은 그야말로 공포 지대였다. 바로 그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현재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가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해이기도 했다.
화성연쇄살인은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4년 7개월 동안 무려 10차에 걸쳐 자행됐다. 시신은 논두렁, 농수로, 야산 등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대부분 귀갓길이었다. 몇몇 피해 유가족들은 하루 최소 두 번은 지나는 길목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화성을 떠났다. 화성에서 나고 자라 이곳을 뜰 수 없었던 피해자 유가족들은 매일 눈물을 머금고도 괜찮은 척 고향 사람들과 어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성은 ‘신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 1일 생활권’ 위성도시로 홍보되며 사람들이 몰렸다. 불빛이 꺼졌던 자리엔 아파트, 학교, 성당, 대형 마트, 공장 등이 들어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24시간 인공 불빛을 내뿜었다.
연쇄살인 6차 사건(1987년 5월 2일) 피해자가 발견된 진안리(현재 진안동) 야산엔 ‘메이커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 3년 전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이 아무개 씨(54)는 “이곳이 거긴 줄 전혀 몰랐다”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이제 다 지나간 일인데 괜히 동네 소문 안 좋게 날지도 모르니 안 좋게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지난 9월 18일 연쇄살인 유력 용의자가 드러났다. 대한민국의 눈과 귀는 30년여 전 그때처럼 화성시로 쏠렸다. 1986년생 56세 이춘재 이름이 TV에 오르내렸다. ‘화성시’에 사는 사람은 그의 이름을 대부분 몰랐지만, 과거 ‘화성군’에 살았던 화성시민 중에는 그의 이름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진안리 토박이 B 씨는 C 초등학교를 나왔다. 이춘재는 C 초등학교 27회 졸업생. 당시 이 동네엔 초등학교가 하나였다. 이춘재보다 몇 해 선배인 그는 이춘재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알지 왜 몰라. 춘재 동생이 아직도 이 동네에 살아. 며칠 전에도 내가 봤는데 인사를 얼마나 잘한다고. 춘재 엄마, 할머니, 아들이 저기 ‘메이커 아파트’에 살잖아. 춘재 동생은 여기서 세차장 한다고.”
이춘재의 가족은 6차 사건 피해자가 발견된 야산에 지어진 그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아파트가 지어진 장소 주변이 이춘재가 살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이춘재의 소식을 말하던 B 씨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착했다고 사람이. 물론 교류는 많이 없었지만 말이야. 처제를 죽인 건 집 나간 아내 찾으려다가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그런 줄 알았지 참.”
이춘재 동생이 운영하던 세차장은 잡초가 무성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영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세차장이 문을 닫은 후에도 이 씨의 동생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 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후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언론을 통해 자신의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란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던 이춘재의 모친도 자취를 감췄다. 이춘재의 할머니와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9차 사건이 발생했던 병점리(현재 병점동) 야산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원 형태의 뒷산이 남이 있을 뿐이었다. 사건 장소로 추정되는 곳엔 성당이 자리 잡았다. 사진=최준필 기자
현재 심경을 듣고자 이춘재 동생에게 전화를 수차례 걸었지만, 수화기 저편에 기계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피해자는 무슨 피해자, 그때 같았으면 돌 맞아 죽었어요.”
‘가족들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 아니겠느냐’는 말에 D 씨가 발끈했다. 그의 눈에 그때의 공포가 떠오른 듯 보였다. D 씨는 1986년 당시 27세 여성으로 진안리에 살았다.
“TV를 보는데 내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언니 쟤 내 동창이야. 결혼할 사람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라고요. 그 뒤엔 집에 조금만 늦게 와도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했어요. 안 겪어 봐서 모르겠지만 그 공포는 당시엔 엄청났죠. 엄마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맞선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변을 당한 2차 사건(1986년 10월 20일) 피해자 박 아무개 씨(25)는 D 씨 동생의 친구였다. 그때부터 죽음의 공포는 남의 것이 아니었다.
30년여 전 공포에 휩싸인 건 여성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진안리 토박이 E 씨는 “20, 30대 남자 중에 경찰에 불려가서 안 얻어맞은 사람 없다”고 기억했다.
당시 개인 사업을 하던 E 씨는 9차 사건(1990년 11월 15일)이 발생했던 날 일을 마치고 수원역 근처 모텔에서 잠을 청했다는 이유로 용의 선상에 올랐다. 당시엔 모텔에 들어갈 때 ‘숙박 확인증’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그걸 깜박하는 바람에 더 큰 의심을 받았다. 경찰이 임시 거점으로 쓰던 역 근처 모텔 방에서 사흘 동안 붙들려 심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받았다고 했다.
“경찰이 당시 여자친구가 나한테 전화하게 해서 유도 심문도 하고, 사무실에 도청 장치 숨겨 놓고 그랬어. 아주 나쁜 놈들이야. 나는 안 맞았지만 당시에 돈 없고, 빽 없고, 부모 없는 애들 불려가서 뾰족 구두에 밟히고, 갈비뼈 부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E 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모방범으로 드러난 8차 사건의 범인 윤 아무개 씨를 진범이 아닌 피해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윤 씨는 우리 동네 애였다. 걔는 그럴 수 있는 애도 아니다. 절음발이에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며 “현장 검증할 때도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걸 똑똑히 봐서 기억한다. 우리는 경찰이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윤 씨는 당시 모방범으로 체포됐고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됐다. 그럼에도 동네 주민들 사이에선 이런 얘기가 나돌고 있다. 그만큼 마을 주민들은 당시 강압적이었고 한편으론 부실했던 경찰 수사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선에서 이 사건을 수사했고 지금은 은퇴했다는 한 형사는 “폭행을 하거나 영화처럼 아무나 데려나가 조사하고 그러지 않았다. 당시도 법이 있었다”며 “할 수 있는 건 다했던 것 같다”고 반박했다.
화성열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과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황계리 논 전경. 사건 피해자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위치에 쌓여있던 볏짚 더미에서 발견됐다. 사진=최준필 기자
현재 사건을 재수사 중인 경기남부경찰청 관계자는 “8차 사건 범인 신상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면서도 “당시 형사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수사를 한 것도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을 떨칠 수 없는 사람은 또 있었다. 범행으로 미성년자인 딸을 잃은 부모였다. 심경을 듣고자 초인종을 누르자 유가족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형사고 기자고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왜 들쑤셔 놓느냐 말이야. 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나왔지만 그의 눈은 충혈된 채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도 이춘재와 같은 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기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5차 사건(1987년 1월 10일)이 발생한 황계리 논두렁은 유일하게 과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피해자는 볏짚에 파묻혀 있었다. 돼지죽을 쑤기 위해 볏짚 더미를 찾은 마을 주민이 첫 발견자다. 그 위치를 정확히 가리킬 만큼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던 F 씨는 피해자 부모의 소식을 전했다.
“그 가족이 여기 바로 윗마을에서 셋방살이했지. 사고 난 다음에 바로 이사 갔어. 견딜 수 있었겠어? 어휴. 이제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은 몇 없어. 죽거나 이사 가거나 그랬지.”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