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에 사망한 9차 사건 피의자의 형 인터뷰…“어머니는 생존 피해자” 주장도
연쇄살인 10차 사건 가운데 9차 사건은 당시에도 가장 큰 파장을 불러왔다. 화성 토박이들은 “9차 사건이 가장 시끄러웠다. 경찰 병력이 화성에 쫙 깔렸었다. 정말 살벌했다”고 입을 모은다.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컷.
영화 속 박해일은 살아갔지만, 실제 9차 사건 피의자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윤 아무개 씨는 그렇지 못했다. 윤 씨의 형 A 씨는 동생이 경찰의 강압 수사 후유증으로 7년을 고생하다 27세 나이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0월 8일 만난 A 씨는 동생뿐 아니라 어머니도 화성 사건의 피해자라고 추가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털어놨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족은 그때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에 눈시울을 붉히던 A 씨는 “지금이라도 경찰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입을 열게 된 이유라고 답했다.
윤 씨는 1990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해 인근 악기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집엘 들어오지 않았다. 5일 정도 흐른 뒤 TV에서 윤 씨가 9차 사건의 유력 용의자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A 씨는 그제야 동생이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생이 조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동생 얘길 들으니 5일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여관방에 잡아다가 수사를 했대요. 마대에 넣어서 ‘온 국민이 이제 널 범인으로 안다’고 자백하라고 했답니다.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27번 썼대요. 현장검증 때 ‘실수’하지 않도록.”
사건이 발생하고 A 씨가 동생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현장검증 때였다. 당시 9차 사건이 발생한 야산을 경찰 병력이 꽁꽁 둘러싸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다. A 씨는 변호사를 선임해 겨우 현장검증을 하던 현장에 올라갈 수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들이 경찰에 둘러싸인 동생을 찍고 있었다.
“동생 눈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완전 포기한 눈빛이요. 동생을 가족이 면회를 오질 않으니까 가족도 포기한 줄 알았답니다. 그때 동생이 절 처음 본 거죠. 동생이 그제야 용기를 얻어서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현장검증이 중단됐습니다.”
A 씨는 현장검증 다음날 화성경찰서로 동생 면회를 갔다. 팅팅 부은 동생 얼굴 전체에 ‘안티푸라민’이 발라져 있었다. A 씨는 동생 얼굴이 반질반질했던 기억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윤 씨는 강간살해와 더불어 강제추행 혐의까지 적용돼 재판에 넘겨졌다. 동네 이발소집 딸을 추행했다는 것이었다. 강간살해는 무혐의가 났고, 강제추행은 집행유예였다. A 씨는 경찰이 강제추행을 추가시킨 건 동생을 흉악범으로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10년 정도 흘렀을까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발소집 주인께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엔 경찰이 와서 도와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경찰은 당시에 없던 혐의도 만들어서 동생한테 뒤집어씌웠고, 동생은 흉악범으로 몰려서 구치소에서 24시간 밥 먹을 때도 수갑을 차고 있었어요.”
구치소에 3개월을 수감돼 있던 윤 씨는 마침내 풀려났다. 윤 씨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했다. 회사 건강검진에서 가슴 부근에 무언가 발견됐다. 풀려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원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대학 병원에 가랍니다. 갔더니 의사가 형인 저만 불러요. ‘악성 육종’이랍니다. 갈비뼈에 종양이 생긴 거죠. 동생은 물론 가족에게 말 못 하고 2년 동안 밤에 혼자 울었어요. 어떻게 말할까요. 그 고생을 한 동생한테. 동생은 뭔지도 모르고 수술 받았어요.”
육종은 뼈에 생기는 종양으로 정확한 발병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윤 씨는 20세, 키 177cm에 75kg으로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할 만큼 건강했다고 한다. 윤 씨는 당시 수술을 받았지만 2년 후에 재발해 5년을 병상에서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동생의 병원비를 대는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됐다. 암 보험도 없던 시절 동생 병원비는 한 달에 350만 원 정도였다. 당시 일반 직장인 월급은 100만 원 남짓이었다. 도저히 병원비를 댈 돈이 없어서 동생을 퇴원시켜 집에서 돌보기도 했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됐다.
“아버지가 땅 사려고 보자기에 돈을 싸놨던 게 기억나요. 다 썼죠. 변호사 비용, 동생 병원비로요. 생활이 안 되죠. 돈이 없어서 동생을 집에 뒀는데, 동생이 엄마한테 뭐 먹고 싶다고 심부름을 시켜요. 그러곤 머리맡에 있는 전화로 몰래 응급차를 불러서 2번 병원에 간 적 있어요. 진통제 맞으려고요. 가슴이 찢어지는 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동생은 갔지만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가족의 몫이었다. 당시 이웃 주민들은 화성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토지 보상을 받아 부족하지 않게 살지만 A 씨는 여전히 어려운 형편을 이어가고 있다. A 씨는 경찰을 원망하는 마음과 울분을 30년 동안 버리지 못했다.
“국가상대로 소송이요? 동생이 강제추행으로 집행유예 받아서 부끄러워서 어디 말도 못 했어요. 먹고 살기 바빴고요. 그 울분을 평생 잊지 못하죠. 한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때 경찰들, 정말 잘못했습니다. 처벌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받고 싶어요.”
인터뷰 끝에 A 씨는 약도를 그려가며 자신의 어머니가 연쇄살인 사건 ‘생존 피해자’라고 했다. 장소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였다.
인터뷰 끝에 A 씨는 약도를 그려가며 또 하나의 사정을 털어놨다. 자신의 어머니가 연쇄살인사건 ‘생존 피해자’라고 했다. 피해 시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1986년 9월 15일 발생한 ‘화성 1차 사건’ 전이라는 것이다.
A 씨에 따르면 당시 A 씨의 어머니는 범인한테 ‘너 남편 뭐 하느냐’, ‘아들은 뭐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범인은 재갈을 물리진 않았지만 입에 흙을 집어넣었다. 연쇄살인범의 범행 수법이 진화했다는 점에 비춰봤을 때 수법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어머니는 열 세 차례 칼에 찔렸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죽은 척했더니 범인이 그냥 두고 갔단다. 여전히 그때의 상처가 몸에 남아 있다. 그건(성폭행을 당했는지는) 아들로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에 경찰이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동생 일도 동생 일이지만 모친의 일도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다.”
화성연쇄살인 유력 용의자 이춘재가 살인 14건 외에도 30건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언하면서, 경찰은 여죄를 밝혀내기 위해 수사하고 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