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사 서포트 못 받고 ‘둥지’ 옮겨 재데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판 깔았다
지난 5월 해체한 걸그룹 프리스틴. 사진=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첫 그룹에서 고배를 마신 멤버들이 다른 그룹으로 옮겨가는 것은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다. 한참 아이돌 제작이 활발했던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까지도 이 같은 ‘둥지 옮기기’는 빈번한 일이었다.
이들의 희망은 걸그룹 포미닛의 전 멤버 현아의 사례처럼 되는 것이었다. 원더걸스 탈퇴 후 포미닛으로 재데뷔한 현아는 당시 가장 성공적인 재데뷔로 눈길을 끌었다. 더욱이 원더걸스가 미국 활동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포미닛이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면서 이들의 성패가 뒤바뀌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후 현아는 강렬한 이미지 변신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솔로 데뷔까지 하며 승승장구했다.
성공은 극소수에만 주어지기 때문에 더 빛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경우는 재데뷔 당시만 반짝했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무대 뒤로 사라져야 했다. 성공의 가장 뚜렷한 예가 현아와 포미닛이었다면, 실패의 가장 뚜렷한 예는 허찬미와 파이브돌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원더걸스 탈퇴 후 포미닛으로 재데뷔, 이후 홀로서기까지 성공한 현아. 사진=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당초 ‘오랜만의 혼성그룹’으로 눈길을 끌었던 남녀공학은 멤버 열혈강호(본명 차주혁)와 가온누리(본명 강인오)의 미성년자 음주 논란과 일진설로 결성 1년 만에 공중분해됐다. 이들 두 명을 탈퇴시킨 뒤 남은 남자 멤버들은 SPEED로 재데뷔했고, 상대적으로 경력이 깨끗했던 여자 멤버들은 전원 파이브돌스로 재데뷔했다. 이처럼 동일한 그룹에서 갈라진 멤버들이 유닛이 아니라 정식 그룹으로 전원 재데뷔한 경우는 가요계에서도 이례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은 ‘재활용 그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결국 각각 데뷔 4년, 2년 만에 해체에 이른다. 남녀공학 당시의 논란이 재데뷔로 덮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지만, 더 큰 이유는 그룹이 아직 정상적으로 안착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멤버 변경을 지속한 데 있었다. 가뜩이나 ‘재활용 그룹’과 ‘중고 신인’이라는 미묘한 위치에 있어 인기몰이도 쉽지 않은데 멤버들까지 계속 바뀌니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남녀공학과 파이브돌스를 거치며 가수로 활동했다가 다시 연습생 신분으로 떨어진 허찬미의 경우는 가장 안타까운 사례로 꼽힌다. 파이브돌스 해체 후 절치부심한 허찬미는 더블킥 컴퍼니로 소속사를 옮긴 뒤, 데뷔 5년 만에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가 ‘프로듀스 101’로 세 번째 데뷔를 준비했다. 그러나 최종 멤버 선발 직전에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이후 유사 프로그램인 ‘믹스나인’에 출연해서도 씁쓸한 결과를 받았다.
걸그룹 소녀시대 데뷔조를 거쳐 남녀공학, 파이브돌스 데뷔, ‘프로듀스 101’ ‘믹스나인’ 등에 연습생으로 출연한 허찬미. 사진=엠넷 제공
허찬미는 ‘소녀시대’ 데뷔 조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소녀시대의 멤버가 될 뻔 했다”는 꼬리표는 남녀공학이나 파이브돌스 데뷔 당시는 물론, 프로듀스 101과 믹스나인 때도 그의 이름 석 자에 항상 붙어 나왔다. 그룹도, 방송도 허찬미의 이 같은 이미지를 표면에 내세워 반짝 관심을 몰았지만 마지막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더블킥 컴퍼니에서도 데뷔가 무산된 허찬미는 이후 모스테이블로 다시 소속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연습생 신분이었던 그는 ‘하이컬러’라는 이름의 4인조 걸그룹 데뷔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프로젝트가 엎어지면서 무산됐고, 현재는 솔로 가수 데뷔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최근 더 크게 불거지고 있는 아이돌의 재데뷔 현상을 놓고 “합리적인 제작 방식”이라는 긍정적인 반응과 “절박함을 이용한 게으른 소속사의 만행”이라는 부정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긍정적인 측은 기존 그룹 활동 당시 인지도를 새 그룹에서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이 덕에 신인에 비해 비교적 빠른 성장세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엠넷 ‘프로듀스 48’ 제작발표회 현장. 사진=박정훈 기자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재데뷔를 진행하는 소속사의 대다수는 대형 연예기획사처럼 롱런을 기대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투자 대비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을지에 주목할 것”이라며 “이미 인지도나 지지층을 확보한 상태라면 그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 소속사로서도 재데뷔 멤버로서도 나쁜 일만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부정적인 측은 “이미지 소비만 가속한 뒤 훗날은 책임지지 않고 버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연예기획사의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어느 그룹 출신, 어느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신 누구라는 꼬리표로 일단 시선부터 끌고 보자는 게 최근 아이돌 재데뷔 양상”이라며 “이는 멤버 개인에게만 이미지 소비를 담당하게 해서 그룹 성패를 전부 짊어지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최근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난립으로 이 같은 문제가 고착화됐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 관계자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인지도만 올리면 데뷔도, 재데뷔도 이전보다 수월하다 보니 소속사는 스스로 콘셉트를 잡는 데 게을러지고 멤버들만 절박해지는 상황”이라며 “문제는 재데뷔 자체가 아니라 이를 위해 소모품처럼 이용되는 멤버들과 이를 당연시 여기는 업계에 있다”고 짚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